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칼럼] 한글 창제한 신미대사가 머문 법주사(法住寺)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10.08 16:38
  • 19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구글+
네이버 밴드
네이버 블로그
네이버 폴라
핀터레스트
URL 복사
성스러운 곳에는 그럴만한 설화나 전설이 서려있다. 속세를 떠난 산속에 부처님 법이 머무르고 있는 절이라는 뜻 때문이다. 속세(俗)를 떠난(離) 산(山)을 뜻하는 속리산(俗離山)에 부처님 가르침인 경전 법(法)이 머무르고(住) 있는 절(寺)이라는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가 바로 그 도량이다. 그곳에서 한글을 창제하는데 중심 역할을 한 신미대사가 산내 암자인 복천암에서 머물렀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인 553년 의신화상이 인도 유학 후 흰 노새에 불경(佛經)을 싣고 돌아와 절터를 찾을 때 흰 노새가 발걸음을 멈춘 자리가 바로 현 법주사라는 설화가 전해져 오는 곳이다. 이 같은 설화는 중국과 파키스탄 불교 성지에도 전해온다. 중국 후한 시대 황제의 후원으로 유학을 떠난 스님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귀국길에 불경을 흰 말(白馬)에 싣고 가다가 백마가 멈춘 곳에 낙양의 중국 첫 사찰인 ‘백마사(白馬寺)’를 세웠고, 파키스탄 스와트 지역에는 코끼리가 불경을 싣고 가다 멈춘 곳에 거대한 스투파를 조성했다고 한다.


법주사는 영심 스님이 신라 혜공왕 12년인 777년에 유식(唯識) 사상과 미륵 신앙을 신봉하는 법상종 종찰로 새로 세웠다고 한다. 불교 학자들은 법주사가 팔공산 동화사와 같이 유식 사상과 미륵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신라 시대의 법상종 계열 사찰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근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법주사에서 미륵 신앙의 회복 움직임을 보였다는 점도 미륵 신앙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주불 전인 대웅보전, 팔상전, 금동미륵대불, 추래암 마애불 등이 바로 미륵 신앙을 상징하고 있다. 대웅보전은 의신 조사 스님이 553년에 창건한 이후 지난 2005년 10월 4년의 해체 복원 불사 끝에 옛 원형이 복원된 한국 3대 불전 가운데 하나이다. 대웅보전 안에 흙으로 빚은 소조삼불좌상(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은 한국의 소조 불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부처님상이다.

금동미륵대불은 과거에 대웅전(28칸)보다 웅장했던 용화보전(2층 35칸)터 부근에 모셨다. 용화보전은 고종 9년 1872년에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 주조의 명목으로 헐릴 만큼 규모가 웅장했다고 한다. 그 터에 2000년부터 2002년 6월까지 불상에 금박을 입히는 개금불사를 회향, 금동미륵대불의 모습을 회복했고 기단부 안에는 용화보전을 모셔 미륵보살이 머문다는 도솔천, 벽면에 13개의 미륵십선도를 부조했다.

능인전 옆의 추래암(墜來巖)은 ‘떨어져 내린 바위’라는 의미로 그 상봉인 수정봉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추래암 벽면에는 벼랑에 새겨진 부처라는 고려 시대의 마애불이 전법전륜인 형태의 수인을 하고 연화대좌에 앉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의 왼쪽 아래에는 짐이 실린 말을 끌고 있는 사람, 말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의 조각이 있다. 말은 의신 조사가 인도에서 경전을 싣고 와서 법주사를 창건하였다는 설화를 나타내고, 소는 진표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법주사로 가는 도중에 소가 진표율사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였다는 설화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마애불의 북쪽 벼랑에는 지장보살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입멸 후 미륵부처님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시대를 주재하면서 미륵부처님에게 부처님 법을 전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부처님의 중계자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암각의 지장보살은 미륵부처님 출현을 기다리며 수행하는 모습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창건설화와 함께 추래암 마애불 옆의 거북 바위와 관련된 전설도 이어져 온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 대장으로 온 중국 명나라 이여송 장군의 꿈에 “조선국 속리산에 가면 거북 바위라는 돌이 있다. 그 거북 머리는 중국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 중국 측 재물이 조선으로 들어간다. 만약 그곳을 찾아가서 짚신이 없으면 곧 그 목을 쳐라”라고 하였는데 법주사의 스님들도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스님들 꿈에 거북이가 나타나서 자기 머리맡에 짚신을 놓아 달라는 것이었다. 스님들이 영문도 모른 채 며칠씩이나 그 바위 앞에 짚신을 놓았으나 아무런 일이 없자 쓸데없는 일인 듯싶어 짚신을 치워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여송은 추래암 마애불 옆의 거북 바위를 지나가다 짚신이 보이지 않자 곧 거북 바위의 목을 쳐버렸다는 것이다.

금동미륵대불 앞의 희견보살석상(喜見菩薩石像)은 향불을 머리에 이고 머리의 뜨거움, 손의 뜨거움을 잊고 일심으로 공양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진표율사나 제자 영심 스님 등이 대성(大聖)의 수기를 받기 위하여 일신을 아끼지 않던 법상종 특유의 신앙 형태를 조형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미륵불에게 드릴 가사와 발우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가섭존자 상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법주사 가람 배치는 화엄 신앙과 미륵 신앙이 병존하고 있는 것으로 불교학자들은 보고 있다.

법주사 산 내 암자인 복천암은 세종대왕의 휘하에서 집현전 학자와 한글학자로 한글 창제의 주역이었던 신미 대사가 주석했던 곳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