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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다(茶)와 선(禪) 일미(一味) 본향 대흥사(大興寺)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10.10 14:45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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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모시는 천도제나 법회 때 수백 년 동안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인용구를 들라면 단연 으뜸인 게 있다. 바로 서산대사의 해탈시와 임종 시 남긴 임종게 중 일부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내린 들판을 걸어 갈 때)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함부로 어지러이 발걸음을 내딛지 말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이 되리니)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생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남이요)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스러짐이라)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生死去來亦如是(생사가래역여시,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임종 전 그의 의발(衣鉢)을 대흥사에 보관하라 한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 차(茶)문화를 선(禪)과 접목시킨 초의(草衣)스님 등 13분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스님 등 13분의 대강사(大講師)를 근세기까지 배출했기 때문이다. 초의스님은 차를 통해 추사와 다산 등 당시 유교와 불교를 회통시켜 대흥사를 우리나라 차(茶)문화의 성지로 우뚝 솟게 했다. 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고 한다.

대흥사가 다선일미차(茶禪一味) 본향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바로 서산대사의 의발이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선조 37년인 1604년 1월의 어느 날 북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한 청허당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스님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불가에서 가사와 발우를 전한다는 것은 본인의 법을 전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왜 그런 외진 곳을 택했는지 궁금해 하는 제자들에게 서산대사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면서 그곳은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종통(宗通)이 돌아갈 곳”이라고 말했다. 서산대사가 입적하자 제자들은 다비한 후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워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영골(靈骨)은 금강산 유점사 북쪽 바위에 봉안했다. 하지만 금란가사(金爛袈裟)와 발우는 유언대로 지금의 대흥사인 대둔사에 모셨다. 바로 서산대사의 법맥이 대둔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서산대사는 출가전 어려서부터 불가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3세 되던 해 사월초파일에 아버지가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며 두 손으로 어린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우며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 하라고 한 뒤부터 아명이 운학으로 불렀다고 한다.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에도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를 쌓아 올려놓고 탑이라 하며 놀았다고 한다. 불(佛)씨가 이미 어렸을 때부터 커가고 있었던 것이다. 서산대사라면 흔히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서 활약한 것만이 알려져 있지만 선(禪)과 교(敎) 더 나아가서는 좌선, 진언, 염불, 간경 등 여러 경향으로 나뉘어 저마다 자기들의 수행만을 최고로 치던 당시 불교계에서 “선은 부처의 마음이며,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며 선교 양종을 통합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때문인지 서산대사의 의발이 모셔진 이후 대둔사는 그의 법을 받아 근세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와 13분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자리 잡아 왔다.

또한 대흥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내 일지암(一枝庵)은 초의(艸衣 1786~ 1866년)스님이 차문화를 부흥시킨 곳이다. 이 곳에서 초의선사는 출가 후 세속 나이 52세 되던 해인 1837년 다도(茶道)를 시로 설명한 동다송(東茶頌, 동쪽나라의 차를 칭송하다)을 지었다. ‘동다송’은 차의 역사, 차나무의 품종, 차의 효능, 만드는 법, 생산지와 품질, 한국차의 역사와 다도의 전통 등이 전체 31송(頌)으로 구성돼 있다. 불교의 게송(揭頌)으로 우리나라 차를 이야기 한 것이다. 초의선사가 일지암에 머물던 시기는 추사 김정희(1786~1856년)와 다산 정약용(1762~1836년)에게는 생애 최대의 시련을 겪는 유배시절이었지만 차(茶)를 통해 추사는 친구로, 다산과는 4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학연을 맺은 소중한 시절이었다. 차(茶) 안에 부처의 진리(法),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을 추사와 다산에게 일깨운 계기가 된 대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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