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신라 시대에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중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명산 오악(五岳; 동학 토함산, 서악 계룡산, 중악 팔공산, 남악 지리산, 북악 태백산)중 하나로 지정됐다. 당시부터 지리산에서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화엄사 초입에는 남악사(南岳祠)라는 제당이 남아 있다.

한국의 신령스러운 성산(聖山)중 하나인 지리산 지명은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舍利菩薩)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부처님이 법계 평등의 진리를 깨달아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기린 화엄경(華嚴經)에서 실천적 행동과 수행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구현하자고 그 성산에 사찰을 세웠다는 것이다. 바로 그 화엄사(華嚴寺)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화엄사 사적기에 따르면 창건 연대가 추정만으로 이어져 오다 화엄사가 화엄 사상의 근본 도량이 된 중요한 계기는 의상대사 보살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상대사는 당나라에 유학 후 귀국, 화엄 사상을 알리면서 곳곳에 화엄 도량을 창건 중수하였는데 이 시기에 화엄사도 중창됐다고 한다. 이후 경덕왕(742-764) 시절에 8가람, 81암자를 둘만큼 대사찰로 확장돼 '남방제일 화엄대종찰'로 우뚝 서게 됐고, 조선 시대인 1426년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됐다. 숙종 때 성능 스님이 장륙전(丈六殿)을 3년에 걸쳐 중창 불사를 회향하자 숙종은 각황전(覺皇殿)이라고 사액하고 화엄사를 '선종 양종 대가람'으로 격상시켰다.

화엄사 각황전은 숙종의 비였던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가 자기의 아들 연잉군이 조선의 왕이 되기를 기원하여 대화주 보살 역할을 자원하면서 지어졌다고 한다. 연잉군은 숙빈최씨의 아들로 52년간 재위했고 83세까지 장수한 조선의 최장수 왕 영조이다.

사적기와 민간에 내려온 설화에 따르면 숙종의 비였던 숙빈 최씨의 첫째 아이가 장희빈의 저주와 구박을 받아 일찍 죽은 뒤 숙빈 최씨는 명찰을 찾아 정성으로 득남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이가 영조이다. 숙빈최씨는 아들인 연잉군 세자가 조선의 왕이 되기를 축원하며 지리산 화엄사의 계파스님과 함께 각황전을 복원했다. 각황전은 경복궁의 근정전보다도 더 큰 건물이다. 각황전의 상량문에 의하면 대시주자가 바로 숙빈최씨와 연잉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영조와 인연이 깊은 사찰은 화엄사와 대구 파계사이다. 화엄사는 숙빈 최씨가 아들이 조선의 왕이 되기를 축원하며 각황전의 대시주자로, 파계사는 용파스님의 도반 농산 스님이 죽어서 영조로 환생했다는 것이다. 영조 대왕의 소식과 채식, 검소한 생활과 백성을 살피는 마음들은 전생에 닦은 불심의 인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각황전과 관련한 설화가 또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화엄사를 다시 짓기 위해 불사를 전담할 화주 승을 선발했다고 한다. 물독에 손을 넣어 물에 젖은 손을 다시 밀가루가 든 독에 넣어 밀가루가 묻어나지 않는 스님을 적임자로 정했다. 모든 스님의 손에 밀가루가 묻어 나오는데, 마지막으로 공양주 스님만은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았다. 이때 문수보살이 화주 승에 현몽하여 이르되 “절을 나가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무조건 시주를 받아야 한다”라고 당부를 들은 화주 승이 절을 나섰으나 처음 만난 사람은 동냥해서 먹고 사는 거지 노파였다. 이 노파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시주를 청하자 노파는 매우 난감해하다가, 다음 생에 시주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냇물에 빠져 죽었다.

화주 승은 여인을 죽게 한 죄의식으로 여러 해 동안 세상을 떠돌다가 중국의 수도에 들어간다. 그런데 중국 황제의 공주가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손을 쥐고서 펴지 못하고 있어서 불력(佛力)으로 이를 펴게 하니 손바닥에 장륙전(丈六殿)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에 황제가 부처님의 가피로 알고 장육전 불사의 화주 보살로 나섰고 황제에게 불교사상을 깨우쳐 주었다고 하여 그 이름을 각황전(覺皇殿)이라 하고 사액(賜額)하였다는 것이다.

불교학자들에 따르면 화엄사는 신라 교종의 계율종, 법상종, 법성종, 열반종, 화엄종 등 5교 중 하나인 화엄종 도량으로 신라시대 당시에 대단한 교세를 떨쳤고 신라 말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선종(구산선문)의 영향으로 교종의 세력이 감소한 이후에도 다른 종파와는 달리 세력을 유지했다. 화엄사가 화엄종으로 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9세기 중반 이후 사상적 재정비와 함께 해동 화엄의 초조인 의상대사와 그에게 화엄 사상을 전한 지엄 스님을 기리면서 선종에 비해 약했던 계보의식이 강화되고, 886년 정강왕이 형 헌강왕의 명복을 축원하며 왕실과 결속을 강화하려고 했던 화엄 결사 영향도 컸다고 한다.

화엄사의 가람배치는 화엄 법계의 연화장세계에 이른 단계를 지형의 형세를 반영하여 배치한 사지 가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화엄사의 가람은 원사봉과 형제봉 사이의 계곡을 따라 남북 축선을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고 거기에 경사진 직형을 여러 단으로 나누어 대지를 다듬고 각 전각이 지니는 의미와 중요도에 따라 단계별로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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