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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 칼럼] 반대는 분열을 의미하는지
  • 배상익 선임기자
  • 승인 2019.10.15 13:43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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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훈 박사(서경대학교 나노융합공학과 학과장)
[일간투데이] 사회현상부터 물리현상까지 이분법적 분류가 전체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크다/작다, 길다/짧다 부터 총론과 각론, 미시와 거시 등 고상한 요소들도 전체를 찬성과 반대로 나누고 있다.

반대는 인류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한 개념인 것 같다. 반대되는 부분을 잘 살펴보면 상황의 파악이 용이하고 어려움을 극복할 길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반대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반대는 분열을 의미하는지?

글을 읽지 못하던 나이라 저녁 때 아버지가 오늘 신문을 찾으시면 신문 더미에서 킁킁 냄새를 맡아 그 날 신문을 가져다 드리던 때였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우유를 배달시키셨는데, 정사각형 하얀 비닐에 통통하게 들어있는 우유를 커다란 유리컵에 부어 소금을 조금 넣는 일이 내 일이었다.

부뚜막 위에서 소금단지 뚜껑을 열어 아주 살짝 소금을 집어 우유잔에 넣었는데, 평소보다 좀 많이 넣은 듯했다. 짜지 않을까? 살짝 우유 맛을 보니 짠 맛이 났다.

얼른 부뚜막의 설탕 단지를 열어 설탕을 조금 넣었다. 달지 않을까? 역시 살짝 단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소금을 넣었다. 엇, 짜다. 설탕을 더 넣어야 하겠다. 달다. 단맛을 없애야 하니 소금을 더. 이렇게 서너 번 반복하다 보니 더럭 겁이 났다. 짜고 달고 한 맛을 아버지께서 싫어하실 것 같았다.

그래서 솔직히 상태를 말씀드리고 아버지 앞에 우유를 내려놓았다. 하나도 화를 내지 않고 꿀꺽꿀꺽 소리가 나도록 우유를 들이켜시더니 “네 수고를 봐서 다 먹으려 했다마는 도저히 더는 못 먹겠구나.” 내려놓고 출근하셨다.

당시만 해도 우유가 귀한 음식이었으니 남은 우유를 마셨다. 도저히 못 먹을 맛이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짠맛은 왜 단맛의 반대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쓴맛이 단맛의 반대 맛도 아니었다. 쓴 커피에 단 설탕을, 부드러운 크림을 넣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반대’, ‘정 반대’라는 것은 -1과 1을 더했을 때 0이 되는 것처럼 상대방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나니 ‘상대방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을 사람들이 반대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반대라고 일컬어지는 상대는 다른 상대의 특징을 더 드러나게 해주고,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손길에 의해 의사표시의 효율을 높이는데 사용된다.

우리나라 수도의 두 장소에서 열리는 집회를 보는 시각도 매우 다양하지만 누구나 두 집회의 성격은 반대라고 하고, 집회 참가자 역시 다른 곳에서 열리는 집회는 자신들의 입장과는 반대라고 말한다.

한 집에서 어머니는 검소하게 살자 하고, 아버지는 적당히 돈도 쓰고 즐기며 살자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두 분의 의견은 정말 반대일까? 아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 모두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론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두 분이 두 손 꼭 잡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해결될 문제인 것이다.

반대가 분열이고, 분열은 나쁜 것이라고 시선을 고정하면 반대라는 개념의 장점인 효율성을 활용할 여지도 없어지게 된다. 일단 최근 가장 뜨거운 반대되는 두 집회를 보자.

한 쪽 집회에서는 어린이들까지 데리고 즐겁게 나오지만 다른 집회에서는 용돈을 받아야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한 쪽은 기독교인이 많이 와도 전혀 헌금을 내지 않는데 다른 집회에서는 "헌금 내는 시간이 가장 즐겁고 기쁜 시간"이라며 일부러 헌금을 걷는데 뒤에는 스님들도 배석했다.

그래서 한 쪽은 종교집회라 하는데 다른 쪽은 "우리가 주인"이라며 "우리 주권으로 정치하러 나왔다"고 정확히 정치집회라 드러낸다. 한 쪽은 돈을 걷으면서도 재정적 부담이 있다 하고, 다른 쪽은 헌금을 걷지 않는데도 재정 부담 이야기가 없다.

두 집회 모두 국민으로서 의견을 표출하러 나왔지만 주장은 반대다. 하지만 두 집회의 기저에 깔린 대의명분에는 다행히 공통점이 있다.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지는데, 이 자유를 침해하는 방법은 그것을 막는 침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헌법 21조의 자유는 모두 ‘의사 표현’에 대한 것이다. 표현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자유의 침해도 있지만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에 경제적인 요소를 개입시켜 개인의 의사를 증폭시키거나 감소시키거나 뒤틀린 상태로 표현하게 하는 것도 새로운 차원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자유의 반대는 자유의 침해이기도 하지만 자유의 반대 쪽 다른 곁가지에는 자유의 왜곡도 있다고 보여 진다.

돈을 주고 집회에 나올 사람을 사거나 돈 받고 집회에 나오는 행위는 우리 조상들이 일구어 낸 3·1 운동, 인도의 대 문호 타고르가 누가 시키거나 돈을 주지 않았는데도 우리 민족을 ‘동방의 등불’이라 부르게 만든 인류 역사 상 가장 위대한 결사에 대한 모독이다.

그래서 우리가 본능적으로 집회에 나오는 분들이 돈을 받는 행위에 대해 ‘어! 이상한데?’라고 느끼는 것이고, 무엇인가 표현 못할 불편함이 있는데도 그런 행태에 대해 크게 화낼 근거가 없는 듯 보여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르신들께서 용돈 좀 받으실 기회가 생긴 것을 좋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어르신들께 용돈을 챙겨드리려면 집회와 상관없는 적절한 기관을 통해 어떠한 조건 없이 나누어 드리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돈 만 원이라도 언론·출판의 주체에게 돈을 주는 것이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로 처벌받게 되어있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소중한 언론·출판의 자유를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에 대한 개혁의지. 이를 실현하려면 반대되는 부분을 관찰하고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서로 지적함으로써 더 나은 집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제는 집회·결사의 주체에게 돈을 주는 것이 특정 정치집단의 목적을 위한 집회·결사의 자유를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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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익 선임기자 news101@hanmail.net

정치행정팀 선임기자(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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