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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걸의 창건설화] 깨달음 시조 혜능대사 머리에 봉안된 쌍계사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10.21 14:34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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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깨달음을 일컫는 돈오(頓悟)의 선풍을 우리나라에도 일으키면서 차(茶)와 함께 뿌려 그 꽃을 피운 다선일미(茶禪一味) 근본 도량이 있다.

선(禪)은 몸과 마음을 맑히는 수행의 방편인 차(茶)와 같은 맛이라, 이곳은 선과 차가 함께 하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다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고 법석을 장엄하는 범패가 어우러진 곳이 바로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자리 잡은 대한불교조계종 13교구 본사인 쌍계총림 쌍계사이다.

쌍계사는 724년 신라 성덕왕 23년에 삼법(三法) 스님과 대비(大悲) 스님이 창건했지만 이후 840년 문성왕 2년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작은 수행처에 불과했던 이곳을 남종선의 시조인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頂相)을 모셔와 육조 혜능대사의 법맥을 이어받아 중창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법 스님의 쌍계사 창건 설화를 담고 있는 사적기에 따르면 삼법 스님은 676년 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의 제자가 돼 경장과 율장을 통달한 후 당시 중국에 육조 혜능(慧能) 스님이 크게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았지만 입적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금마국 미륵사(金馬國 彌勒寺)의 주정(主晶) 스님이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혜능대사의 설법집 ‘육조단경(法寶壇經)’을 보게 됐다. 경전을 읽던 중에 스승이 이르기를 “내가 입적한 뒤 5~6년이 지나서 1인이 내 머리를 취하러 올 것이다”라는 대목을 읽다가, ‘내가 마땅히 힘껏 도모하여 우리나라에 만대의 복전을 지으리라’고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에 김유신(金庾信)의 부인이었던 법정(法淨) 스님에게 2만 금을 빌려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가서 그곳에 때마침 신라 스님인 대비선백(大悲禪伯)과 만나 두 사람이 서로 친하여 의논하던 중 절에 기거하던 장정만(張淨滿)에게 2만 금을 주고 육조의 정상을 갖고 귀국해 법정 스님이 머무는 영묘사(靈妙寺)에서 밤마다 육조의 정상에 공양을 올렸다. 그러던 중 한 스님이 꿈에 나타나, 자신의 인연 터가 지리산 아래의 눈 속에 등나무 꽃이 핀 곳이니 그곳으로 옮기도록 했다고 한다. 이에 대비선백과 함께 눈 덮인 지리산을 헤매던 중 12월인데도 따뜻하기가 봄과 같고 등꽃이 만발한 곳이 있었다. 이곳에 돌을 쪼아서 함을 만들고 깊이 봉안한 뒤 조그마한 암자를 세운 것이 시초였다.

이처럼 쌍계사의 창건은 삼법 화상이 육조 혜능 선사의 정상을 안치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실제의 가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신라말 진감선사(眞鑑禪師)에 의해서이다. 쌍계사 대웅전 앞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진감선사 대공연탑비문(眞鑑禪師 大空靈塔碑文)’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가 어느 날 잠깐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인도 스님이 찾아와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하고는 유리 항아리를 주고 간 태몽을 꾼 뒤 태어났다. 진감선사는 태어날 때 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7~8세가 되어 아이들과 놀 때는 언제나 나뭇잎을 태워 향으로 삼고, 꽃을 따서 공양을 올리는가 하면, 때로는 서쪽을 향해 꿇어앉아 해가 저물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부처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생선장수를 하며 가족을 봉양하는 데에 힘쓰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길러 주신 은혜를 오로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니, 이제 도의 뜻을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않으랴”하고는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31세 되던 804년 애장왕 5년에 뱃사공으로 중국으로 가 육조 혜능 선사의 법손인 창주(滄洲)의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만나게 됐다고 한다. 이때 신감대사가 “반갑다.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기쁘게 다시 서로 만났구나”라고 반기면서 불가와의 인연은 시작됐다. 37세(810년)에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의 금강계단(瑠璃戒壇)에서 구족계를 받은 이후 신라에서 온 도의 선사(道義禪師 후에 가지산문의 제1조)와 인연을 맺게 된다. 혜소 스님(진감선사)은 57세 귀국, 경북 상주 지금의 남장사에 주석한 이후 지리산(현 국사암 터)에 머물며 선문(禪門)을 열어 선을 전파하면서 마땅한 가람터를 찾던 중, 어느 날 호랑이 몇 마리가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앞길을 인도해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곳으로 가니, 이곳이 바로 화개곡(花開谷)의 삼법 화상이 남긴 절터였다. 이 터에 절을 짓고 대나무 통으로 물을 끌어와 집 둘레 사방에 물을 대어 옥천사(玉泉寺)라 명명하면서 중국에서 차(茶)의 종자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고 대가람을 중창했다.

진감국사에 의해 비로소 쌍계사가 처음으로 가람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는데, 헌강왕이 즉위하여 그 절터를 살펴보니 동구에 두 시냇물이 마주 대하고 있으므로 ‘쌍계사(雙磎寺)’라는 제액을 내렸다. 이로부터 옥천사는 쌍계사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쌍계사 입구 근처에는 '차시배추원비(茶始培追遠碑)', '해동다성진감선사추앙비', '차시배지(茶始培地)' 등의 기념비가 있다. 차는 828년 흥덕왕 3년에 김대렴(金大簾)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김대렴이 차를 심은 이후 진감선사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차밭을 조성, 보급하였다고 한다. 쌍계사는 도의국사와 동시대에 활약한 진감선사가 육조 혜능 선사의 남종선인 돈오선을 신라에 최초로 전법한 도량이자 차의 발상지이며 해동범패의 연원이다. 이 때문에 쌍계사는 선(禪), 다(茶), 음(音)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절에서 500m 거리의 암자인 국사암(國師庵) 뜰에는 진감국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아났다는 천년이 넘은 느릅나무 사천왕수(四天王樹)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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