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 36년 전 판례유지…"가족제도 유지 위해 필요"

[일간투데이 권희진 기자] 혼인 중에 태어난 자식의 유전자와 아버지의 유전자가 다른 것으로 확인돼도 법적으로는 친자관계로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3일 A씨가 자녀들을 상대로 낸 '친생관계부존재 확인소송' 상고심에서 "유전자 검사에서 혈연관계가 없다는 점이 밝혀졌더라도 친자식으로 추정된다"라며 '인공수정'처럼 다른 사람의 정자로 임신·출산했다는 사실이 인정된 경우에도 친생자 추정 원칙이 적용된다고 판단했다.

A씨 부부는 A씨의 무정자증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자 1993년 다른 사람의 정자를 사용해 인공수정으로 첫째 아이를 낳은 뒤 두 사람의 친자식으로 출생신고를 했다.

이후 1997년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자신의 무정자증이 치유된 것으로 오판한 A씨가 자신의 아내가 출생한 둘째를 의심 없이 친자식으로 출생 신고 했다.

이후 A씨는 가정불화를 겪으며 2014년 아내와 이혼 소송을 진행했다.

이혼 소송 과정에서 A씨는 자신의 둘째 자녀가 부인의 외도로 출생한 '혼외자' 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이후 A씨는 결혼 생활 중 출생신고를 마친 두 자녀를 상대로 친자식이 아니라며 소송을 냈고 이후 법원이 시행한 유전자 검사 결과 두 자녀 모두 A씨와 유전학적으로 친자관계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1심은 두 자녀 모두 "친생추정 예외사유에 해당하는 '외관상 명백한 사정'이 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친생관계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83년 판결에서 '부부가 동거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 명백한 외관상 사정이 존재한 경우에만 친생자 추정이 깨질 수 있다'며 친생 추정 예외사유를 제한적 범위 내에서만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진 2심에서는 "둘째 아이의 경우처럼 유전자가 다른 것으로 확인된 경우에도 친생추정 예외사유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이 소송에서 재판부는 친생관계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 가능성은 인정했지만 "친생자 관계가 아니라도 법정 양친자 관계가 인정된다"며 A씨가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부부가 동거하지 않은 기간에 태어난 자식에 대해서만 민법상 '친생자 추정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36년 전 판례를 따르기로 한 것으로 해석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심 판단과 달리 예외사유가 아니라고 결론 냈지만, '원고 패소'라는 재판 결과가 2심과 같아 '2심 재판을 다시 하라'는 파기환송이 아닌 원심 판결을 유지하는 상고기각을 선고했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유전자가 다른 것으로 확인된 자식을 상대로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2년 이내에 '친생 부인(否認)의 소'(친자식 추정을 번복하는 소송)를 제기하지 않으면 더는 친자관계를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아울러 재판부의 판결문에서 혈연관계 유무를 기준으로 친생자 추정 원칙이 미치는 범위를 정하는 것은 민법 규정의 문언에 배치된다고 밝혔다.

아울러 "혼인 중 아내가 출산한 자녀가 유전자 검사로 남편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점이 밝혀졌더라도 친자식으로 추정된다"고 판시하면서 "친생자 추정 원칙은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를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고만 정하고 있을 뿐"이라며 "혈연관계의 존부를 기준으로 그 적용 여부를 달리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에는 기존의 가족제도를 보호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른 것이라고도 밝혔다.

재판부는 "혈연관계 없이 형성된 가족관계도 헌법과 민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가족관계에 해당된다"며 "이러한 가족관계가 오랜 기간 유지되는 등 사회적으로 성숙해지고 견고해졌다면 그에 대한 신뢰를 보호할 필요성이 크다"고 전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이 같은 판단은 부부가 동거하지 않았을 때 생긴 자녀만을 친생자 추정 원칙의 예외로 인정한 기존 판례를 유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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