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광사 종루. 사진 제공 송광사

백두대간이 남서쪽으로 기세를 떨치다 마친 산 동남쪽 종남산 끝자락에 송광사가 있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2에 있는 송광사는 가지산파의 시조이자 전남 순천시 소재 승보종찰 송광사(松廣寺)를 세웠다는 도의(道義) 스님이 중국 산시성 시안 남쪽의 종남산을 본뜬 명칭이라고 한다. 산 지명을 종남산(終南山)이라 한 뜻은 도의 국사가 절터를 찾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에서 영천수(靈泉水)를 발견하고 더는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송광사에서 송광(松廣)은 소나무가 많다는 의미인데 현재 종남산에 소나무가 적어 순천시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사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송광사가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통일신라 말이다. 종남산 남쪽에 영험 있는 샘물이 솟아나 그 옆에 절을 짓고 백련사라고 했다고 한다. 보조 체징(普照體澄, 804~880) 선사가 설악산 억성사에서 수행하다 선법의 요체를 구하러 중국에 유학하러 가던 길에 백련사가 영험 도량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잠시 머무른 인연으로 귀국해서도 가지산 보림사와 종남산 백련사에 번갈아 주석하면서 도의국사의 선법으로 널리 교화했다고 한다. 이때 체징 선사는 백련사를 선종의 종취에 따라 송광사로 개칭했다.

송광사 사적기 등에 따르면 창건은 583년 도의 스님이 절터를 찾다가 신령스러운 샘물이 솟는 것으로 보고 터를 잡아 절을 창건했다는 설과 867년에 보조 국사 체징 스님이 창건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송광사는 강원도 철원 심원사, 전북 고창 도솔암, 충남 서산 개심사와 함께 한국의 4대 지장 도량으로 영가들의 넋을 위로하는 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병자호란 때인 1641년 인조 19년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 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원하고 국난으로 인한 일체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던 호국 도량역할을 했다. 또 병자호란 때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기록관인 전주사고를 지키기 위해 승군 700여 명이 머문 호국 도량역할을 하기도 했다.

송광사는 4대 지장 성지 하나답게 '땀 흘리는 부처가 있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경내에 대웅전, 지장전, 나한전 등 전각들을 중심으로 대웅전은 사찰의 중심 전각일 뿐만 아니라 '땀 흘리는 부처님'이라는 이적 현상으로 시선을 끌고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불 5.5m와 약사여래불 및 아미타여래불이 각각 5.2m로 삼존불이 봉안돼 있다. 전북 지역에서 보기 드문 대형 소조불이다. 1933년에 대웅전 불상에서 불상 조성 연기를 기록한 묵서에 따르면 조선의 왕과 왕비의 만수 기원, 병자호란으로 청나라로 포로가 돼 끌려간 소현 세자, 봉림대군 등의 빠른 송환 기원 등이 포함돼 있다. 이는 대웅전 삼존불상의 봉안이 국가의 안녕을 바라는 시주자들의 염원과 왕실의 발원 차원임을 읽을 수 있다.

대웅전의 불상은 석가모니부처님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진묵 대사가 점불정(點佛睛)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바로 이 불상에서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이적을 보인다고 하고 특히 아미타여래 좌상은 국가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도 알려져 있다.

1991년 2월에 대웅전 마루가 흥건할 정도로 땀을 흘렸는데 당시 강경대 학생이 시위 진압 중인 경찰에 맞아 죽는 사건, 10여 명이 넘는 젊은 대학생들이 몸을 불사르는 분신 정국이 잇따랐다고 한다. 또한, 아미타불은 1993년 전북 위도 해상에서 발생한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때와 1996년 북한 잠수함이 나타났을 때도 땀을 흘렸다고 한다. 1997년 12월에도 송광사 대웅전 아미타불에서 땀이 흘러내렸는데 당시 IMF 사태 등 나라의 어려움을 부처님께서 걱정하는 이적이었다고 스님과 신도들은 풀이하고 있다.

나한 신앙과 관련된 다양한 영험담도 전해온다. 전주에 사는 한 거사는 위암으로 수출을 받게 됐었는데 마취를 한 후 수술실에서 송광사 나한을 보고 쾌유했다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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