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gchoi62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최종걸의 창건설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성안의 절 전등사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10.30 11:17
  • 19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구글+
네이버 밴드
네이버 블로그
네이버 폴라
핀터레스트
URL 복사
   
▲ 전등사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삼랑성을 따라 걷기 명상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전등사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과 관련된 유적이 남한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성안에 절이 있다.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三郞城)의 원래 이름은 발이 세 개 달린 솥을 엎어놓은 모습이라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이지만 단군의 아들과 관련돼 삼랑성으로 더 친근하게 불린다. 바로 그 삼랑성 안에 있는 전등사(傳燈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아도화상(阿道和尙)이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창건했다고 한다.

강화도 남단 정족산 산등성이를 따라 단군의 세 아들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가 쌓았다는 삼랑성안에 있는 전등사는 이 성의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이 성의 문(동문, 남문)들이 전등사의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창건 당시는 진종사(眞宗寺)라 했지만 고려 시대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1282년 인기(印奇) 스님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해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玉燈)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傳燈寺)로 바꿨다고 한다.

수많은 전란 속에 전등사가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된 계기는 조선 시대인 1678년 숙종 4년에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써 조선 왕실의 비호를 받게 된다. 1726년 영조 2년에는 영조 대왕이 전등사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題額)을 써 주고 고쳐 걸게 하는 한편 이후로도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 불사(重修佛事) 시에 중수에 쓰인 재목 대부분을 시주했고 현 대조루(對潮樓)도 당시 건립했다.

1719년 이후 이 절의 주지 스님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내려 1910년까지 유지했다.

가람 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山地伽藍)의 형태로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보전이 있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돼 있는데, 내부에는 석가·아미타·약사 여래의 삼 불과 1916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한 『법화경 法華經』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대웅보전 실내 기둥에는 전란시 주둔중이었던 군인들이 부처님에게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달라는 글귀들이 쓰여있기도 하다.

대웅보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裸女像)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 여타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조형상이 있다. 하여 이를 본 신도마다 각기 나름대로 그 사연을 전하는 바에 따르면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했다는 이야기다.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는 경구를 나녀상으로 상징했다는 것이다.

전등사 경내에 보관 중인 철종은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다른 중국 종으로, 일제강점기 말기에 군수물자 공출 때 빼앗겼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돼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됐다.

또 경내에는 수령이 600여 년이나 된 암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지만, 철종 임금 이후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 스무 가마를 요구하는 등 관리들의 횡포 심했다고 한다. 이에 노스님은 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불교를 탄압할 것을 염려해서 인근 백련사에 있는 도력이 높은 추송 스님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나자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기도가 끝나는 날 이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었다고 한다. 추송 스님은 기도를 마치고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하는 순간 때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었고, 비가 무섭게 내리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이를 두고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풀이하고 있다. 이후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한다.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