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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걸의 창건설화] 조선불교 맥을 되살린 강남 봉은사(奉恩寺)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11.05 13:18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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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삼성동 강남 봉은사 미륵대불에서 한 밤중에도 신도들이 찾아와 기도중이다.
조선시대 불교는 철저히 배척당해서 스님들을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으로 격하시키고, 불교 절을 대폭 축소하려는 정책에 따라 1406년 태종 6년에 국가가 인정한 사찰을 242개사로 줄였고, 다시 1424년 세종 6년에는 전국의 사찰 중에서 선교양종(禪敎兩宗) 각 18개 사찰씩 36개만 선정하여 3700여 명의 스님만 인정하는 숭유억불 정책의 수난 시대였다.

하지만 이 같은 탄압속에서도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奉恩寺)는 794년 신라 원성왕 10년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한 이래 수많은 전란 속에 끊어질 뻔한 조선불교의 맥을 되살린 왕찰로 그리고 수도 불교의 상징으로 사세가 부흥 중이다.

연회국사가 창건 당시 견성사(見性寺)라 하였지만 조선 시대인 1498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자신의 남편인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을 위해 능의 동편에 있던 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을 봉은사라고 개칭했다. 이어 자신의 아들인 11대 임금 중종의 무덤인 정릉이 옮겨지면서 나라에서 절에 왕패(王牌)를 하사한 왕찰로 거듭났다.

봉은사가 전국 수사찰로 떠오른 것은 명종 대 문정왕후와 보우 스님의 불력으로 극적으로 부활했다. 중종 때인 1539년 중종 34년에 대대적으로 사찰을 모두 철거하려는 정책을 추진하며 그 중심에 봉은사를 그냥 두고서 다른 사찰을 철거하는 것으로는 스님들을 근절시킬 수 없어서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지만, 명종이 즉위하고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섭정을 편 문정왕후의 불심으로 조선불교는 극적인 부활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문정왕후는 1550년 명종 5년에 선교양종을 부활하여 봉은사를 그 본산으로 하도록 하고, 연산군 이후 실시하지 않았던 스님들의 과거인 승과(僧科)를 '경국대전'에 의거해 다시 시행하도록 했다. 선교양종의 부활에 따라 양종 체제가 다시 기능을 되찾으면서 봉은사는 선종 수사찰(禪宗首寺刹)이 되고, 교종의 수사찰인 봉선사와 함께 불교계를 이끌게 된다.

보우 스님이 봉은사 주지로 취임 이듬해인 1552년에 승과를 실시한 결과, 33명의 급제자를 선발해 도첩제가 다시 시행됐는데 이때 승과에 합격한 33인 중 서산대사 휴정 스님도 배출됐다. 이후 서산대사 휴정 스님이 1555년에 교종판사가 되었다가 가을에 선종 판사가 돼 봉은사 주지를 맡았다. 1562년에 시행한 승과에서는 사명대사 유정 스님을 배출했다. 보우 스님의 왕성한 활동을 바탕으로 장차 조선 후기 불교계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배출해 그 기반을 다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에 이어 1636년 병자호란으로 봉은사는 거의 전소되었다가 1692년 숙종 18년에 선대 왕의 묘인 선릉과 정릉을 찾아온 숙종은 절 앞에서 가마를 멈추고 절의 중창 역사를 보고는 특별히 재물을 시주해 절 중창을 도왔다. 이후 조선 말기 봉은사의 역량을 보여준 건 1856년 화엄경 80권 판각 불사의 회향이다. 당대의 화엄 강백이었던 남호 영기(南湖 永奇1820-1872) 대사는 조선 교학의 중추이던 화엄 경판을 판각하기 위해 인허 성유, 제월 보성, 쌍월 성활 스님 등과 뜻을 모아 1855년 철종 6년에 봉은사에 간경소를 차리고 왕실의 내탕금과 중신들의 시주를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1년 동안에 걸쳐 화엄경 양본을 대조하고 후학들을 위해 그 교감기를 붙인 화엄경(華嚴經) 80권 등의 불서를 1856년 철종 7년에 간행하고, 이들 3479판에 이르는 경판을 보관할 판전(板殿) 불사를 회향했다. 여기에 당시 봉은사에서 수행하던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와 화엄경 간행 불사에 초의 의순(1786-1866) 선사도 증명 법사로 참여했다. ‘대웅전(大雄殿)’과 ‘판전(板殿)’ 편액은 추사 김정희 글로 특히 板殿은 김정희가 죽기 3일 전에 썼다.

성리학 중심의 사상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사조를 수용한 북학의 정수를 대성한 추사 김정희가 초의 선사와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고, 초의 선사는 김정희뿐만 아니라 정약용, 홍현주, 신위, 김유근 등 당대의 실학과 유학의 대가들과 폭넓은 교류를 통해 유불선을 회통시킨 곳이 바로 왕찰이자 조선불교의 맥을 되살린 봉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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