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길위에서 생각한다

수 년 전, 유로화가 통용되기 이전에 독일의 화폐는 마르크(mark)였다. 그런데 유럽연합(EU) 이 출범하면서 각국의 통화도 ‘유로’로 통일되었다. 기존에 쓰던 화폐가 유로화로 교체될 때 많은 독일 사람들은 이 화폐의 폐지를 몹시 아쉬워했다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전쟁의 폐허에서 ‘라인 강의 기적’ 을 이루어낸 저력이 바로 이 화폐 속에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화폐는 단순히 돈이 아니라 독일인들의 자긍심이며 역사, 그 자체였다. 도대체 거기에 무엇이 담겨 있기에 아직도 독일 사람들은 예전에 쓰던 화폐에 대한 향수를 지우지 못한단 말인가?

독일 화폐 중에 우리나라 만원권에 해당하는 10마르크짜리 지폐를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보통 화폐에는 위인이나 유명인들의 초상화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화폐만 해도 만원권에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인 세종대왕의 초상화가 있고 5,000원권에는 이이 선생, 1,000원권에는 퇴계 선생의 초상화가 있다.

또 유로화 도입 이전의 프랑스 화폐에는 예술의 나라답게 유명한 예술가들의 초상화가 있었다. 인상주의 화가인 폴 세잔, <어린 왕자> 의 작가인 생텍쥐페리, 인상주의의 시조로 불리는 음악가 드뷔시 등······.

그런데 독일의 10마르크짜리 지폐엔 위대한 왕도 아니고, 유명한 예술가도 아닌, 빵모자를 쓴 한 초로의 남자가 얼굴을 디밀고 있다. 그리고 그옆엔 수학공식이 적혀 있다. 이 주인공은 프리드리히 가우스(Friedrich Gauss)라는 수학자이다.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로 꼽히는 가우스는 아르키메데스, 뉴턴과 함께 3대 수학자로 꼽힌다. 그는 대수학과 해석학, 그리고 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수학에 수학적 엄밀성과 완전성을 도입하여 수리물리학으로부터 독립된 순수수학의 길을 개척했고 전자기학, 천체역학, 중력론, 측지학 등에도 큰 공헌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정수론이나 최소제곱법 등으로 독자적인 수학적 업적을 이루었고, 괴팅겐 대학에 재학하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연구에 몰두해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가우스의 초상화 왼쪽에는 정규분포곡선이 그려져 있고 이 곡선의 복잡한 함수식이 적혀 있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엔 어려운 이 공식을 굳이 적어놓은 것이 일단 눈길을 끈다. 정규분포란 도수분포곡선이 평균값을 중앙으로 하여 좌우대칭인 종모양을 이루는 것으로 신장의 분포나 성적 분포 등 그 예는 무수히 많다. 이것을 일컬어 가우스 분포라고도 하며, 그 곡선을 가우스 곡선이라고도 한다. 가우스가 ‘수학은 과학의 여왕’ 이라고 했듯이 이 같은 수학공식은 많은 과학적 성과로 이어졌다.

실생활에서도 가우스 곡선을 응용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모토롤라사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품질향상운동으로, 최근에 기업들이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하기로 했다는 ‘6∑운동’ 도 그렇고, 여론조사에서 ‘신뢰수준95%에 표본오차 3.1%’ 식의 개념도 이 곡선에서 나온 것이다.


10마르크 화폐의 앞면을 잘 구경하고 뒤집으면 뒤에는 측량기구인 트랜싯과 삼각측량 성과도가 그려져 있다. 이 화폐에서 우리는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하는 나라, 독일 사람들의 과학하는 정신을 읽을 수 있다. 한 나라의 상징물인 화폐에까지 수학자, 공식, 측량장비 등을 그려놓는다는 건 그만큼 과학을 중시한다는 뜻이니, 가히 ‘과학하는 나라’ 답다.

이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 요즘 국가적으로도 가장 우려할만한 일은 이공계를 기피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는 현상이다. 오죽하면 고등학생들이 부모 앞에서 ‘정 그러시면 이과로 전과해 버릴래요’라고 하는 말이 가장 협박적인 언사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겠는가? 이대로라면 수년 안에 'IT강국‘ 이라는 말은 빛 바랜 구호로 남을지 모른다. 또 우리의 과학수준과 기술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칠지 모른다.

우리에겐 일상생활에서도 비과학적인 면이 너무 많다. 정확한 측량법대신 ‘고기 3인분 주세요’ 라든지 ‘소주 서너 병 주세요’ ‘왼쪽으로 죽 가면 우체국이 나와요’ 하는 식이 통하니 말이다.

20세기를 마감하던 1999년, <타임스(The Times)> 의 마지막 이슈는 ‘Man of the Century(금세기의 인물)’ 였다. <타임스> 편집자들은 과학자 아인슈타인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하고, 인류 ·문명· 정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규정했다. 그리고 21세기는 초과학의 시대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 과학의 시대였던 20세기에 과학자가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면 초과학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가 될 것인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때 과학은 그 나라의 미래 정도가 아니라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프라이다. 그중에서도 수학은 가장 기본적인 기초과학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수학교육은 ‘쉬운 문제를 빨리 푸는 방법’ 만을 가르쳤다. 어려운 문제를 풀기위해 본질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알 필요조차 없었다.

실제로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운 , log2, sin π같은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본질적인 개념은 소홀히 한 채 달달 외우기만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우리 일상생활 곳곳에는 비과학적인 요소가 쌓여 있고, 우리는 점점 과학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 길을 닦는 일도, IT강국을 만드는 일도, 그리고 경쟁력 있는 산업을 키우는 일도 모두 과학의 토대 위에서 가능한 일들이다. 우리는 미래와 운명을 포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지금이라도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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