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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걸의 창건설화] 구산선문 중 첫 선문을 연 가지산 보림사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11.07 14:16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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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림사 대적광전내 통일신라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사진 제공 보림사
참선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수행으로 삼는 선종(禪宗)이 신라 말과 고려 초 우리나라에 처음 유입됐다. 전국에 9개 문파가 각기 독자적인 선(禪) 수행을 했다 해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하고 그 중 제일 먼저 개산(開山) 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사찰이 전남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보림사(迦智山 寶林寺)이다.

도의(道義)의 가지산문(迦知山門), 홍척(洪陟)의 실상산문(實相山門), 혜철(惠哲)의 동리산문(桐裏山門), 도윤(道允)의 사자산문(獅子山門), 낭혜(朗慧)의 성주산문(聖住山門), 범일(梵日)의 사굴산문(闍崛山門), 지증(智證)의 희양산문(曦陽山門), 현욱(玄昱)의 봉림산문(鳳林山門), 이엄(利嚴)의 수미산문(須彌山門)을 말한다.

선종(禪宗)은 석가모니 부처가 영산(靈山) 설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알았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에서 기원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기 때문에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한다.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이를 중국에 전한 뒤 혜능(慧能)·신수(神秀) 스님등에 의해 이어졌고, 우리 나라의 경우는 9세기 초인 신라 말과 고려 초에 이들 구산선문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로 경전에 의하지 않고 자기 내에 존재하는 불성(佛性)을 깨치고자 한 것이었다.

미국 하버드대학 연경도서관에 있는 1457년과 1464년 사이에 발간된 것으로 보이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에 따르면 신라의 명승 원표 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 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아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때 어느날 장흥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 마리가 판을 치고 있어서 살기가 힘들었다고 호소하였다고 한다. 원표 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 끈질기게 버티고 있어서 이번에는 주문을 독경을 하자 백룡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 놓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고 원래의 못자리를 메워 지은 사찰이 보림사였다는 기록이 있다.

가지산파의 법맥은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인 도의 스님과 이어 염거, 체징스님으로 전수되는 과정에서 보림사는 원래 원표 대덕이 창건했을 당시 화엄 사찰이었다. 하지만 체징스님이 신라말기인 860년경에 주석하면서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먼저 선종이 시작되고 정착된 선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장흥 가지산 보림사는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삼보림(三寶林) 으로 불린다. 보림사라는 명칭은 중국 소주 지역의 선종 총본산인 조계산 보림사에 착안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림사 사적기에 따르면 체징스님이 입적한 3년후인 883년 그 제자인 의초 스님 등이 헌강왕에게 행장을 지어 올리자 헌강왕이 시호를 보조, 사호를 보림사로 내린 것도 육조 혜능 스님이 주석했던 소주 조계산 보림사처럼 보림사를 선종의 총본산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한다. 보림사는 한국에 선종을 알리는 첫 도량인 셈이다.

보림사의 핵심 상징은 대적광전, 대웅전, 조사전, 그리고 보조 선사 창성탑과 탑비로 그 가운데 조사전, 창성탑과 탑비는 선종을 전하고 정착시킨 것과 관련있다고 불교학자들은 보고 있다. 보조 선사 창성탑에는 보조 선사의 사리가 봉안돼 있다. 보조 선사 창성탑비는 통일 신라 헌강왕 10년인 884년에 세웠고 이때 헌강왕은 사호를 보림사로 내려 선종의 종찰로 인정했다.

고려시대에는 사지산문 출신의 최초 국사인 원응 학일(1052-1142) 대선사와 공민왕 왕사인 태고 보우국사(1301-1382)가 주석하면서 융성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인 1515년에는 사천왕상을 조성하는 등 50여동의 전각이 중창되면서 수많은 선사와 강백이 배출됐다고 한다.

하지만 6.25동난 당시 북한군이 막사로 사용하면서 국군 토벌대에 의한 방화로 대부분 전소때 대적광전내 통일신라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어깨부분이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이후 1980년대부터 복원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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