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길을 알고 가자- 오늘의 길, 내일의 길

나그네가 길을 갈 때도 하루 종일 걷기만 할 수는 없는 법, 땀이 적당히 배어날 즈음, 시원한 그늘에 앉아 고단함을 달래며 쉬어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우리도 예서 잠시 쉬어가도록 하자. 그런데 자리를 잡고 앉은 곳이 만약 남태령쯤이라면 문득 궁굼해지는 게 있다. 이곳엔 하필이면 왜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서울과 과천의 경계에 있는 ‘남태령’은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고갯길로 옛날엔 여우가 자주 나타나 ‘여우고개’ 라고 불렸었다. 그런데 18세기 말,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났던 정조 임금이 선친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가는 길에 이곳에서 잠시 쉬게 됐다. 이때 정조가 “이 고개 이름이 무엇이냐?” 고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엉겹결에 “남태령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에 그를 시기하던 자가 “이 고개 이름은 원래 여우고개인데 어찌 거짓을 고하느냐” 고 질책하자 이방 변씨는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지만 신하로서 임금께 그 같은 상스러운 말을 여쭐 수가 없어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만나는 큰 고개이기에 남태령이라고 했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정조가 이방 변씨의 예의 바름과 기지를 칭찬해 이후부터는 이곳을 ‘남태령’ 이라 불렀다 한다.

정조와 관련된 지명을 가진 또 다른 곳으로 경기도 수원시 파장동에 있는 ‘지지대고개’ 가 있다. 전하는 이야기는, 정조가 화성군 대안면 안녕리에 있는 선친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능이 빤히 바라다보이는데 행차는 빠르지 않아, “왜 이리 더디냐” 고 역정을 낸 곳이라 해서 ‘지지대고개’ 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무릇 대부분의 존재들은 이름을 갖고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우선 좋은 의미란 의미는 다 끌어다가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뜻을 골라 이름을 지어준다. 그런데 우리가 다니는 길에 붙은 이름 중엔 어떤 의도를 갖고 붙인 이름보다는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들이 많다.

‘대관령’ 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남녘땅에서 한계령 다음으로 높은 영동의 관문인 대관령은 역사가 깊은 만큼 그 이름도 여러개였다.

『삼국사기』에는 ‘대령책’, 『고려사』에는 ‘대치’,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대령’이라 기록되어 있다. 모두 앞에 큰 대자가 붙은 걸 보면 예로부터 규모가 대단한 고개로 인정받았던 듯 싶다.

그런데 지금 불리는 ‘대관령’ 이라는 이름은 강릉의 촌로들이 붙였던 ‘대굴령’ 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고갯길이 너무 험한 나머지 데굴데굴 굴러 내려갈 정도였다는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어찌 보면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구불구불 고갯길이 끝나는 ‘어흘리’ 에는 더 이상 구르는 걸 면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굴면리’ 라는 동네가 있는 걸 보면 충분히 신빙성 있는 유래다.

이왕 고개 이야기가 나왔으니, 빼놓고 갈 수 없는 곳이 있다. ‘문경새재’ 다. 경북 문경군과 충북 괴산군 사이에는 예로부터 천연의 요새이면서 경상도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며 고개인 새재, 즉 ‘조령’ 이 있다.

이 고개 이름은 ‘나는 새도 넘기가 힘든 고개’ 라는 뜻에서 ‘새재’ 라고 했다고도 하고, 고개 위에 억새풀이 우거져 ‘새재’ 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또 ‘사잇재’가 ‘샛재’ 로 되어 여기에 한자를 붙이다 보니 조령이 됐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우리가 경상도지방을 ‘영남’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영(고개) 이란 바로 이 조령을 일컫는 말로서, 조령 이남지방을 뜻한다,


백두대간의 다른 언덕길이 아스팔트로 뒤덮여 있는 반면, 새재 길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다. 일제강점기였던 1926년, 일제는 서울로 쉽게 들어 가기 위해 ‘이화령’ 이라는 신작로를 만들었고 새재는 옛길이 됐다. 덕분에 지금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다. 최근엔 이화령 고개를 관통하는 터널이 생기면서 이젠 이화령이 옛길이 됐고 새재는 ‘원조 옛길’ 로 물러 앉았다.

서울 광진구 자양동을 지나다 보면 아차산 길이 나오는데 이 ‘아차산’ 의 유래도 흥미롭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설이 있는데 하나는 온달장군과 관련이 있다. 고구려 영양왕 때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아차성이 바로 아차산 아래에 있었다. 적군의 활에 맞아 전사한 온달장군의 영구가 움직이지 않자,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사생이 이미 결단되었으니 아예 돌아갑시다” 라고 말한 후에야 관을 들어 옮겨 장례를 지낼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전설로는 조선 명종 때 점을 잘 치기로 이름났던 홍계관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홍계관이 자신의 운명을 보았더니 아무 해 아무 날에 비명으로 죽을 운수였다. 살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다 용상 밑에 숨어 있어야만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할 수 없이 홍계관은 이런 뜻을 왕에게 상세히 고하고 용상 밑에 숨어 있을 수 있었다.

이때 마침 쥐 한 마리가 마루 밑으로 지나가자 왕은 홍계관에게 지금 지나간 쥐가 몇 마리였는지를 물었다. 홍계관이 세 마리라고 아뢰자 왕은 그의 허무맹랑함에 분노해 형관을 불러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홍계관이 사형장으로 끌려간 후 왕이 그 쥐를 잡아 배를 갈라보니 새끼 두 마리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깜짝 놀란 왕은 홍계관의 처형을 중지하라고 일렀지만 왕의 뜻을 전하러 간 승지가 도작했을 때 사형은 이미 집행된 후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아차!” 하며 무척 애석해했다고 해서 ‘아차산’, ‘아차고개’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망우로’ 라는 길에도 유래가 있다. 청량리 로터리에서 망우동까지 이어지는 약7Km 정도의 이 도로는 , 이 길이 지나는 망우동의 동명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 초,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사직의 기초를 세웠으나 자신이 죽은 후 왕가를 번영하게 할 마땅한 명당을 찾지 못하던중 동구릉터를 발견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환궁하던 길에 망우산 고개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이제 근심을 잊을 수 있게 되었노라” 한 데서 망우리고개, 근심을 잊은 고개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안암로’ 라는 이름 역시 이 도로가 지나는 안암동에서 유래됐다. 지금의 안암동3가 대광아파트 단지 안에 스무 명 정도가 앉아서 편히 쉴 만한 큰 바위가 있어 ‘앉일바위’ 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것을 한자로 옮겨 쓴 것이 ‘안암’ 이 됐다는 것이다.

양재동의 옛 지명인 ‘말죽거리’ 는 왜 또 그렇게 불리었을까?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가면서 배가 고파 말 위에서 팥죽을 먹던 곳이라 해서 말죽거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또 조선시대 지방과 서울을 오가는 여행자들이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고 자신도 쉬어 가던 곳이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전해온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는 길도 그냥 갈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름의 유래를 새기며 가다보면 훨씬 정감 있는 길이 되지 않을까. 조금 먼 길이라도 지루함을 덜 수 있지 않을까.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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