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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걸의 창건설화] 민초와 함께한 결사 도량 강진 백련사(白蓮寺)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11.15 13:22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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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내린 백련사 차 밭. 사진 제공 백련사
불교 혁신의 기치를 내건 결사(結社)를 거슬러 가면 고려시대 '정혜결사', 지난 1947년 '봉암사 결사'가 스님들 중심의 결사였다면 스님들이 민초들과 함께한 결사가 '백련결사' 였다.

바로 그 전남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길 145번지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는 신라 문성왕 때 무염 국사(801~888)가 산 이름을 따라 만덕사(萬德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이후 고려 시대 일반 백성과 스님들이 함께 퇴락한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결사 도량으로 거듭난 곳이다.

고려 희종 7년째인 1211년에 원묘 국사 요세(1163~1245) 스님에 의해 중창과 함께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주도하면서 원묘 국사를 포함한 여덟 명의 스님들이 국사로 배출돼 조명받은 사찰이다.

백련결사는 당시 피폐해가고 있는 고려를 불심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보고자 하는 스님과 국민들의 혁신 운동이었다. 고려 후기 무신정권 시기에 군인들에 의해 정치가 좌지우지되면서 국교인 불교 또한 제 기능을 못 하던 시기에 몽골과 왜구의 잇따른 침략으로 민심은 그야말로 어디다 발붙일 곳이 없는 혼돈의 시기였다. 이때 요세 스님이 피폐해진 민심을 추스르고 퇴락해가는 불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민초들과 함께 결사(結社)를 펼친 곳이 바로 백련사다.

백련결사는 고려 수도였던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남도 땅끝에서 민중들과 함께 참회와 염불 수행을 통해 정토세계(淨土世界)를 염원하는 민중 결사 운동이었다고 사적기는 소개하고 있다.

백련결사에는 요세 스님과 함께 뜻을 같이한 변혁적 열망을 서원했던 스님들, 그 뜻에 공감한 개경의 국자감 유생들(23명), 지역의 토호 세력들, 그리고 불심에 의탁하고자 했던 대중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백련결사는 120여 년간 이어가는 과정에서 쓰러져 가는 고려 불교를 지탱하는 혼불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고려 왕실에서는 백련결사를 이끈 원묘 국사, 정명 국사, 진정 국사, 원조 국사, 원혜 국사, 진감 국사, 목암 국사 등 여덟 명의 스님을 국사로 모셨다는 기록에서도 이를 찾을 수 있다.

고려사기에 따르면 충정왕 3년인 1351년 훗날 공민왕이 되었던 공민왕자가 백련사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백련사는 왕실의 주목을 받았던 사찰이었다.

왕조 교체기를 거친 조선 시대 세종 12년인 1430년에는 세종의 바로 위 형인 효령대군이 백련사 중창 불사를 주도하면서 불교에 귀의한 이후 8년간 큰 법회를 여는 등 다양한 불경 간행을 하며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발원하는 수륙제를 올렸다고 한다.

조선 시대 말기에도 소요 대사, 해운 대사, 취해 대사, 화악 대사, 설봉 대사, 송파 대사, 정암대사, 연파 대사 등 여덟 명의 종사(宗師)가 나왔다고 한다.

‘백련사에서 8국사와 12 종사가 나온다.’라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데, 8국사는 고려 때 나왔고, 조선 시대 8 종사가 배출돼 앞으로 4명의 종사가 나올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백련사가 고려 시대 스님들과 유생 그리고 민초들이 불교의 혁신 운동을 펼친 백련결사의 도량답게 조선조에 더욱 주목을 받은 것은 서학자이자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을 받아들여 불학과 서학이 약탕기 속에 푹 달인 근대 사상체계를 접목한 도량이라는 점도 이채롭다.

다산 정약용이 조선 말기 서학을 기반으로 한 실학의 사상적 기틀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된 마흔 살 때인 1801년 11월에 한양에서 바로 이곳 강진의 백련사 인근으로 유배 온 덕분(?)이었다.

다산(茶山)은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며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600여 권의 대작을 남겼다. 일설에는 다산이 남긴 ‘목민심서’는 동학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됐고, 근현대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이 머리맡에 두고 국민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깨우친 교과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다산이 강진 유배지에 홀로 외로이 귀양살이 때 그를 알아준 이가 바로 백련사 주지였던 아암 혜장(兒庵 惠藏 1772~1811) 스님이었다. 혜장 스님이 조선 최고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과 한국 차(茶) 문화 중흥조 초의스님과 함께 유불선을 교류하는 과정에서 불후의 대작을 18년 동안 내놓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때 정약용의 호도 다산(茶山)으로 정할 만큼 다산 정약용은 혜장 스님 소개로 초의선사를 알게됐고 스님에게 차를 달라고 조르는 ‘걸명소’라는 시까지 지을 만큼 차를 통한 유가와 불가의 융합을 도모했던 곳이기도 하다.


다향천리(茶香千里), 음차흥국(飮茶興國)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귀양살이때 차를 즐긴 다산 정약용은 18년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 집인 남양주로 와서도 불후의 명저를 후세에 남길 수 있게 후덕(厚德)을 베푼 그곳이 백련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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