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님들이 예불 시에 종을 칠 때마다 범종에 새겨진 일본 지도를 두드린 탓에 일본지도 중 홋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고 하는 실상사 범종각. 사진 제공 실상사.
스님들이 예불 시에 종을 칠 때마다 범종에 새겨진 일본 지도를 두드린 탓에 일본지도 중 홋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고 한다.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실상사(實相寺) 범종에는 바로 일본의 지기를 누르고 망동을 저지하기위한 비밀스런 사연이 있었다.

사적기에 따르면 천년 사찰이자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인 828년에 증각대사 홍척(洪陟) 스님이 창건했다. 당나라에서 유학 중 선(禪) 중흥조 마조 도일스님의 제자 서당 지장(西堂 智藏)스님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 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선광(太子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대사는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2대가 된 수철 화상과 편운(片雲) 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가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이처럼 지리산 실상사는 구산선문 가운데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종찰로 홍척 대사가 개산한 절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홍척 대사의 비문에서 ‘북산의(北山義 북쪽 산에는 도의국사), 남악척(南岳陟 남쪽 산에는 홍척 대사)’라고 표현한 것처럼 두 스님은 당시 당나라로부터 선종을 국내에 들여와 개산한 스님이었다.

실상사가 불교 성지로서 분류되는 이유는 한국 선불교의 선구자, 즉 설악산 지역에서 활동한 도의국사와는 달리, 지리산 지역에서 활동한 홍척 대사가 개창한 실상산문의 중심 사찰이라는 점이다. 또한, 전라도 지역에 선종 기반의 여러 선종 산문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특히 약사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좌상은 사각 대좌 위에서 두 발을 앞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완전한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는 선승들이 철불(鐵佛)을 주조해 이전 화엄종 사찰의 화려한 동불(銅佛)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지로 스스로가 화엄종 스님들과 다른 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조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상사에서 철불이 조성된 이후 선종 산문에서 철불 조성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나갔다고 한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창건 당시는 선종 사찰이었지만 어느 샌가 천년 세월을 거치는 동안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방화도 일본과 관련된 것으로 풀이된다.

또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 선상으로 놓여 있어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흐른다.

또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라는 구전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 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스님들이 범종에 새겨진 일본 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홋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일본의 기운을 꺾기 위한 호국 사찰의 사연을 안고 있는 절임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 감정기 때는 이 같은 소문 때문에 일본 경찰들이 종을 치게 했다 해서 주지스님을 고문하는가 하면 아예 종을 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도선 국사의 비보 풍수에도 우리나라 땅의 정기가 지리산 천왕봉을 거쳐 일본으로 흘러간다고 해 사천 근이나 되는 약사여래불을 실상사에 봉안하게 하고 삼층 쌍 석탑과 장육전에 오층 목탑을 세워 지맥을 누르게 했다는 설화도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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