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견사는 설악산의 봉정암, 지리산의 법계사와 더불어 1000m 이상에 자리 잡은 사찰 중 한 곳이다. 요가를 통한 참선 수행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특이한 절이다.
통일신라 제42대 흥덕왕 당시 창건한 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대견사(大見寺)라는 절 이름은 중국 당나라 문종(文宗)이 절을 지을 곳을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낯을 씻으려고 떠놓은 대야의 물에 아주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다. 이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한 문종은 사신을 파견해 찾게 했지만 찾을 수 없게 되자, 신라로 사람을 보내 찾아낸 곳이 이 절터라는 것이다. 이 터가 대국에서 보였던 절터라 해 절을 창건한 뒤 대견사라 했다고 한다.
대견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남긴 일연스님이 1227년 22세의 나이로 승과에 장원급제해 초임 주지로 온 이래, 22년간을 주석하면서 삼국유사 자료수집 및 집필을 구상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수십 년간 자료를 모으기 위해 현장을 답사하고 줄거리를 구성하는 힘이 바로 비슬산 1000m 높이에 자리 잡은 대견사 였다고 한다.
또 절터 바위에 새겨진 유가심인도(瑜伽心印圖)는 여러 겹의 둥그런 환(環)이 가슴과 허리 부분에 새겨져 있는 희한한 모양이다. 참선과 호흡이 잘 되면 몸의 경락이 열리고 이 열린 경락의 모습을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산 중턱에 유가사(瑜伽寺)가 있는데 유가(瑜伽)는 인도의 요가를 한문으로 음사한 표현으로 유가사는 고려 시대 요가 수행을 하던 요가 행자들의 본산으로 불교학자들은 풀이하고 있다. 요가 수행의 결과로 인체 내의 7개 차크라(산스크리트어로 원 또는 바퀴, 에너지 중심을 의미)가 열린 모양을 비슬산 정상 부근의 대견사지 바위 암벽에 새겨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시대 스님 중에 요가 수행의 고단자들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가심인도다.
인체의 경락도(經絡圖)에 해당하는 유가심인도가 새겨진 바위 뒤에는 조그만 동굴이 있다. 서너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천장의 바위틈으로는 빛이 들어온다. 천연 동굴이면서 천장을 통해 약간의 빛이 들어오는 곳을 동천(洞天)이라 하는데 이런 곳은 옛날부터 도사들이나 스님들이 선호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대견사가 강제로 폐사됐다. 비슬산 정상 부근인 대견사가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대마도를 누르고 있다는 설 때문에 폐사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대견사의 대웅전이 일본 쪽으로 향해 대마도를 끌어당기고 일본의 기를 꺾는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강제로 없앴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설화도 지리산 실상사에도 전해온다. 실상사 터가 일본을 누르는 터이고 실상사의 종(鐘) 문양에는 일본 열도가 그려져 있어서 종을 때릴 때마다 일본을 때린다는 설 때문에 주지 스님이 일본 경찰로부터 고초를 겪는가 하면 종을 치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비파(琵琶) 설화다. 비슬산(毗瑟山) 정상 부근의 바위 배치가 비파 모양처럼 돼 있고 대견사를 원래대로 복원해 놓으면 비파의 비파줄을 세우는 형국이 된다는 것이다. 비파는 있는데 비파 줄이 없어서 소리를 못 냈다는 말이다. 대견사를 복원하면 끊어진 비파줄을 복원하는 이치가 되기 때문에 비파소리가 울리면 대구에 상서로운 일이 많아질 수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때마침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기를 꺾는다는 이유 강제 폐사된 후 민족정기를 세우자는 발원으로 100여년만인 2014년 3월 1일 본사인 동화사에서 중창, 복원했다. 앞으로 대구지역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지 관심거리다.
최종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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