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원사 극락전 옆 태안보살상이 빨간모자 동자승을 안고 있는 모습. 빨간모자 동자승은 낙태 유산된 아기들의 영혼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빨간모자 둘레에는 흰 띠가 둘러 있다. 사진 제공 대원사
낙태와 유산 등으로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태아 혼(태아령)의 극락 천도를 발원하는 기도 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는 절이 있다. 전남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에 있는 대원사(大原寺)는 천년 고찰이면서도 태아령 극락 천도와 지장 기도 도량이다.

천봉산 대원사(天鳳山 大原寺)는 보성, 화순, 순천의 경계로 백제 무령왕 3년인 503년에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됐다. 경상북도 선산군 모레네 집에 숨어 살면서 불법을 전파하던 아도화상의 어느 날 꿈속에 봉황이 나타나 “아도! 아도! 사람들이 오늘밤 너를 죽이고자 칼을 들고 오는데 어찌 편안히 누워 있느냐?. 어서 일어나거라, 아도! 아도!”라고 하는 봉황의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창밖에 봉황이 날갯짓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봉황의 인도를 받아 광주 무등산 봉황대까지 왔는데 그곳에서 봉황이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됐다. 봉황의 인도로 목숨을 구한 아도화상은 3달 동안 봉황이 머문 곳을 찾아 호남의 산을 헤매다가 마침내 하늘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봉소형국(鳳巢形局)을 찾아내, 산 이름을 천봉산이라 부르고 대원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다.

천봉산은 지리산, 계룡산, 한라산, 모악산처럼 여산신(성모 산신)과 연관된 산이라고 한다. 대원사에 모셔진 단군왕검의 어머니, 환웅 천황의 황후, 한 민족의 어머니라는 웅녀황비(熊女皇妃)를 모신 성모각도 풍수적으로도 대원사 터는 자궁 속 형세라고 한다.

고려 시대인 1260년 원종 1년에는 조계산 송광사의 16 국사 중 제5대 원오 국사가 55세 때 대원사를 크게 중창해 정토 신앙인 염불과 함께 참선 수행의 선정쌍수(禪淨雙修) 도량으로 명성이 드높았다. 오랫동안 부침을 거듭해 오면서도 대원사 극락전 내부 벽면에 그려진 관세음보살과 달마대사의 모습은 한국 사찰 벽화의 백미로 꼽힌다.

특히 극락전 옆에 있는 태안지장보살상이 조성된 그 자리가 풍수지리상 자궁의 중심부라고 한다. 하여 낙태와 유산 등으로 생명을 잃은 태아의 영혼(靈)을 천도하는 지장 기도 도량으로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태안지장보살은 특히 태아의 영혼을 고통과 원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비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태아령은 부모와 인연이 맺어졌지만, 세상의 햇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간 어린 영혼을 말한다. 태아령 동자상 머리에는 태아의 부모를 상징하는 빨간 모자가 씌워져 있다.

대원사에는 지장 도량답게 현장 스님의 원력으로 김지장전을 모셨다. 중국의 사대 불교 성지중 문수보살의 법신이 계신 오대산, 보현보살의 성지인 아미산, 관음보살의 도량인 보타산, 그리고 지장보살의 성지가 구화산이다. 바로 그 구화산은 99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신령한 산으로 김교각 스님(696~794)이 신라 성덕왕의 첫째 아들로 24세에 출가해 75년 동안 금욕수행하고 99세에 열반후 3년이 지나도 시신이 그대로 있어 이를 금칠을 해 등신불도 남아, 중국 불교의 절대적인 신앙대상이 됐다. 아직도 구화산 지장보전에는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 봉안돼 있다.

바로 김지장전은 김교각 스님의 보살도를 기리기 위한 전각이다. 김지장전의 3면 벽면에는 김지장 스님의 일대기를 벽화로 그려 놓았다.

출가 전 조카 사이면서 송광사로 출가한 법정 스님의 조카인 현장 스님이 2001년 대원사에 김지장전을 조성했다. 이는 지장보살의 위업을 기리는 것 외에 신라 출신 김 교각 스님의 법맥이 중국을 거쳐 다시 현세의 옛 백제 땅에 이어진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풀이하는 불교학자들도 있다.

김지장전에는 중국 구화산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모신 절 주변에서 채집한 1300년 전의 신라 금지차 씨앗을 다시 뿌려 차밭을 조성했다.

중국 ‘구화산 화성사기’에는 "신라의 김교각이 차(쏜)종자를 가져와 구화산에 심었는데 이를 금지차(金地茶)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김교각 스님은 신라에서 중국으로 건너갈 때 선청이라는 삽살개, 오차송이라는 잣나무 종자, 조 씨앗, 황립도라는 볍씨 그리고 금지차라는 녹차 씨앗을 구화산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국사기에 나온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차 씨앗을 구해와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던 것보다 108년이 앞서 이미 차가 수행의 한 방편으로 신라에서도 유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나라 시집에도 김교각 스님 시가 두 편 실려 있는데 한편은 차에 관한 시라고 대원사 측은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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