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성암내 산왕전.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공
한국 불교계의 국보급으로 추앙받는 원효(元曉), 의상(義湘), 도선(道詵), 진각(眞覺) 4명의 스님이 수행했다 해서 사성암(四聖菴)이라는 절이 있다. 사성암은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사성암(四聖庵)길 해발 350m 오산(鰲山)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평지에 우뚝 솟은 바위산 정상부근 암벽에 세웠다.

사성암은 백제 성왕 22년인 544년에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하고 이듬해 오산의 깎아지른 절벽에 사성암을 세웠다고 한다. 사적기에 따르면 즉 원효대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가 수도한 곳이어서 사성암이라고 한다. 송광사 제6세인 원감 국사 문집에도 사성암이 있는 오산(獒山) 정상에 참선하기에 알맞은 바위가 있는데 이들 바위는 도선, 진각 양 국사가 연좌수도 했던 곳이라고도 기록돼 있다. 이 같은 내용으로 미뤄 통일 신라 후기 이래 스님들의 수행처였던 것 같다.

대웅전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돌면 아래로 섬진강이 S자로 돌아 흐르고 구례읍과 지리산 노고단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선국사가 참선했다는 ‘도선굴(道詵窟)’과 원효대사가 손톱으로 새겼다는 '마애여래입상도'가 기암절벽에 새겨져 있다.

도선국사가 수도했다고 하는 도선굴은 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통로를 걸어가 허리를 굽혀 굴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굴은 산꼭대기 바위와 바위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 과연 고승들이 수행을 했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다. 도선굴에서 나오면 고요히 흐르는 섬진강과 구례와 곡성평야가 한눈에 시원하게 들어온다.

묻혀있던 사성암이 알려진 계기는 SBS 드라마 '토지'에서 서희와 길상이가 불공을 드린 장면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사성암에는 산신각 자리가 기운이 많이 뭉쳐 있는 곳으로 산왕전(山王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산신각(山神閣) 명칭보다는 더 높인 표현으로 산왕전이다. 통상 각(閣)보다는 전(殿)이라는 표현이 높여 부르는 것처럼 좌우의 바위 암벽과 뒤쪽의 바위 맥이 내려와 기운이 빠져나갈 수 없는 꽉 조이는 지점에 산왕전이 자리 잡고 있어 기도발이 통하는 곳으로 소문나 있다. 산왕전 법당 안에서 유리창 넘어 밖을 보면 암벽에 벽화가 보인다. 원효 스님이 선정에 들어가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약사여래불’이다. 약 25미터의 기암절벽에 음각으로 새겨진 왼손에는 애민중생을 위해 찻잔을 들고 있다. 스님들은 산왕전이 금강산에 있는 보덕암의 구조와 비슷하다고 한다. 백척간두에 법당을 지어 간절한 기도를 했던 도량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사성암이 위치한 오산에 대해 “산마루에 바위 하나가 있고 바위에 빈틈이 있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 전하기를 승려 도선(道詵)이 일찍이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地理)를 그렸다"라고 기록했다. 암자 뒤편으로 돌아서면 우뚝 솟은 풍월대·망풍대·신선대 등 12 비경이 펼쳐져 있다.

바로 이곳에서 통일 신라 말기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풍수 철학을 연마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위 도선 풍수는 천년을 넘어 한국의 집터와 절터를 잡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 풍수 기법을 한국의 상황에 맞게 토착화한 인물이 도선국사였다는 것이다. 도선국사는 이곳에서 풍수를 자신의 철학 세계로 정립한 것으로 풍수가에서는 풀이하고 있다.

고려 초기 최유청이 지은 도선국사 비문에 의하면 도선은 젊었을 때 구례의 사도촌(沙圖村)에서 지리산 신선인 이인(異人)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이 신선으로부터 풍수도를 지도받았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사도촌(沙圖村)은 사성암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앞으로 보이는 동네이다. 섬진강 모래로 형성된 사도촌은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사도리(上沙圖里)와 하사도리(下沙圖里)로 나뉘어 불린다. 도선국사가 수백 살 먹은 지리산 도사로부터 이곳 사도리의 모래를 쌓아놓고 산의 모양과 강물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야 명당인지를 학습했다고 한다.

조용헌 교수에 따르면 사성암이 자리 잡은 오산(鰲山)은 지리산의 도사들이 어느 정도 공부가 깊어지면 마지막으로 들러서 마무리 공부를 했던 곳이다. 중간단계 이상을 거쳐 고단자로 승단한 신선과 도사들이 지리산 1500m 영봉(靈峯)들의 고단백 에너지를 모두 섭취한 다음 오산(鰲山)에 와서 되새김하는 공부를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오산 사성암에서 마무리 공부를 마치면 그다음으로 계룡산이나 금강산을 찾아 학교에서 배운 공부를 현실에서 적용해보는 실전경험 양성과정을 했을 것이라는 게 조용헌 교수의 추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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