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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걸의 창건 설화] 당나라 소정방이 시주했다는 능가산 내소사(楞伽山 來蘇寺)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12.04 15:18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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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있는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 사진 제공 내소사
불교란 무엇이고 부처란 무엇인가를 금강반야바라밀경 강론을 통해 남녀노소 누구라도 알기 쉽게 설법한 해안(海眼) 스님이 주석했던 절이 있다.

혜안 스님의 고향이자 출가한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있는 내소사(來蘇寺)이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인 633년에 혜구(惠丘) 스님이 한 이후 조선 인조 11년인 1633년에 청민(靑旻) 스님이 대웅보전을 중건한 설화와 이야기가 많은 절이다.

창건 당시는 소래사(蘇來寺)였다가 내소사(來蘇寺)로 바뀐 것은 신라가 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중국 당나라군을 뜰여들일 당시 나당연합군의 총사령관 자격으로 온 소정방(蘇定方) 장군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 절을 찾아와서 군중재(軍中財)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고쳐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이 전란과 화재 그리고 근현대의 6·25동란을 거치면서 소실됐지만, 내소사 대웅보전은 조선 인조 1년인 1623년에 중건된 이후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중건시 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서로 맞물려 만들었다고 한다. 또 법당 내부의 벽면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상 벽화에 얽힌 설화도 생생하게 전해온다.

내소사 사적기에 따르면 대웅보전은 호랑이가 목수로 화현(化現)한 대호선사(大虎禪師)가 지었다고 한다. 대호선사와 함께 대웅전 내부 벽화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인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려져 있다.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모두 나무로만 깎아 끼워 맞춘 대웅보전의 중건 설화는 이렇다. 청민 선사가 절을 중건할 당시 대웅전을 지은 목수는 3년 동안이나 나무를 목침 덩이만 하게 토막 내어 다듬기만 했다고 한다. 대들보와 서까래는 깎지 않고 목침 덩이만 한 토막만 깎는 게 의아했던 갓 출가한 사미승이 장난기가 발동, 그중 한 개를 감추었다고 한다. 목수는 대웅전을 지을 나무 깎기를 마치고 토막 수를 세어보니 하나가 부족, 자신의 실력이 법당을 짓기에 부족하다면서 일을 포기하려 했다. 사미승이 감추었던 나무토막을 내놓았지만, 목수는 부정 탄 재목을 쓸 수 없다 하며 끝내 그 토막을 빼놓고 법당을 완성했다. 그래서 지금도 대웅보전 오른쪽 앞 천장만 왼쪽과 비교하면 나무 한 개가 부족하다고 한다.

또 법당 내부를 장식한 단청에도 한 군데 빠진 곳이 있는데, 대웅전 중건 시 한 화공이 찾아와 단청을 하겠다고 자청하면서 100일 동안 아무도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부탁했다. 화공의 당부에 청민 선사는 스님을 포함해 누구도 화공의 일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고 일렀다. 화공이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밖에 나오질 않자 어느 날 사미승이 법당 앞을 지키고 있던 목수에게 “스님께서 잠깐 오시랍니다”라고 해서 잠시 법당 앞을 비우자 재빠르게 문틈으로 법당 안을 들여다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없는데 오색 영롱한 작은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개에 물감을 묻혀 벽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문을 살그머니 열고 법당 안으로 발을 디밀었다. 순간 어디선가 산울림 같은 무서운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새는 날아가 버렸다. 늙은 호랑이 소리에 놀란 사미승이 정신을 차렸을 때 청민 선사는 법당 앞에 죽어 있는 대호를 향해 “대호선사여! 생사가 둘이 아닌데 선사는 지금 어느 곳에 가 있는가. 선사가 세운 대웅보전은 길이 법연을 이으리라”라는 법문을 남기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그 설화가 1633년에 중건한 대웅보전 이야기다. 대웅보전내 불상 뒤편 벽에 있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큰 백의관음보살좌상의 눈을 보고 걸으면 눈이 따라오는데, 그 눈을 바라보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설화가 내려와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또 내소사에서 소장하다 지금은 전주시립박물관에 옮긴 법화경 사본에 얽힌 애틋한 설화도 있다. 조선 태종 15년인 1415년에 이씨 부인이 죽은 남편 유근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글 한 자 쓰고 절 한 번 하는 일자일배(一字一拜)의 정성으로 써서 공양한 법화경 절본 사본 7권에 관한 것으로 이 법화경의 사경이 끝나자 죽은 남편이 나타나 여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는 것이다.

근현대에 내소사를 알린 스님은 바로 해안(海眼) 스님이다. 해안 스님은 은사인 학명 스님으로부터 은산 철벽을 뚫으라고 하는 화두를 타파하고 내소사에 주석하면서 스님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불교란 무엇인가를 가르쳤다고 한다. 해안 스님이 쓴 '멋진 사람'이라는 시(詩)처럼 스승과 제자 사이를 차별을 두지 않은 호남지역 근대 불교를 지킨 스님으로 불교학자들은 풀이하고 있다. 해안 스님의 ‘멋진 사나이’처럼 말이다.

“고요한 달밤에 거문고를 안고 오는 벗이나 단소를 쥐고 오는 친구가 있다면 구태여 줄을 골라 곡조를 아니 들어도 좋다. 맑은 새벽에 고요히 향을 사르고 산창(山窓)으로 스며드는 솔바람을 듣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불경을 아니 외어도 좋다. 봄 다 가는 날 떨어지는 꽃을 조문하고 귀촉도 울음을 귀에 담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어도 좋다. 아침 일찍 세수한 물로 화분을 적시며 난(蘭) 잎에 손질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도 좋다. 구름을 찾아가다가 바랑을 베게 하고 바위에서 한 가히 잠든 스님을 보거든 아예 도(道)라는 속된 말로 묻지 않아도 좋다. 야점사양(野店斜陽)에 길 가다가 술을 사는 사람을 만나거든 어디로 가는 나그네인가 다정히 인사하고 아예 가고 오는 세상 시름일랑 묻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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