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제공 도갑사
불교과 풍수의 사상적 체계인 유식 사상과 우리나라 풍수 이론의 씨를 심은 절이 있다.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월출산 남쪽 주지봉을 바라보는 넓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도갑사(道岬寺)는 신라말 헌강왕 6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사찰 이름답게 도(道)가 으뜸이라는 절이다. 신라말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이후 왕조를 뛰어 넘어 인근 마을 출신이 출가해 중건했다. 바로 세종과 세조의 왕사 역할을 했던 수미 왕사다.

세조 2년인 1456년에 수미(守眉) 왕사는 왕실의 어명을 받들어 국가적 지원으로 966칸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을 세웠다고 한다. 부속 암자만 해도 상동암, 하동암, 남암, 서부도암, 동부도암, 미륵암, 비전암, 봉선암, 대적암, 상견암, 중견암, 하견암 등 12개암자를 둘 만큼 국찰로 거듭났다.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조선 시대의 사상 속에서도 세종과 세조의 대사와 왕사에 의해 대규모 중창 불사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신미 대사와 수미 대사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세조의 왕사였던 수미 스님이 바로 도갑사 아랫마을 출신으로 창건주인 도선국사와 왕조를 뛰어넘어 창건과 중건을 했다. 비문에 따르면 수미 왕사는 조선 세조 때의 13세에 도갑사에서 출가했다. 그 후 법주사 등으로 다니며 경전 공부를 하다가 도갑사로 돌아와 황폐한 절을 중창했고 불경 언해 기구인 간경도감에서 불경을 번역하는 일을 했다. 세조는 수미 스님에게 묘각(妙覺)이라는 호를 내리고 왕사로 삼았다.

특히 효종 4년인 1653년에는 '도선수미비'와 '월출산도갑사석교 중창비'를 당시 영의정과 형조판서 등 국가의 지도급 인사들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비춰볼 때 신라와 고려를 넘어 조선 시대에 걸쳐 같은 마을 출신이 절을 창건하고 다시 중건하는 이적을 보인 도갑사이다.

하지만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유실됐고,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도 일본강점기와 6.25전란을 겪으면서 불타버렸다.

이후로도 지난 1977년 화재로 대웅보전과 안에 모셔져 있는 많은 성보들이 사라졌다가 1981년부터 범각, 월우 스님 등이 사적도에 따라 옛 가람을 복원 불사를 주도하면서 대가람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특히 해탈문과 마애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문수 보현보살 사자코끼리상, 5층석탑, 대형석조, 그리고 도선수미비 등은 도갑사의 옛 위상을 보여 주고 있다.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는 827년 바로 인근 마을인 구림마을에서 출생, 15세 때인 841에 월유산(월출산) 화엄사로 출가 후 선종 동리산문의 개산조 혜철(惠哲, 785-861) 스님 문하에 들어 ‘무설지설 무법지법(無設之說 無法之法)"의 선리(禪理)를 깨달아 광양 백계산에 옥룡산 파를 성립시켜 선풍을 드높였다고 한다.

선종의 한 문파인 동리산문은 유식 사상의 포용과 풍수지리 사상의 수용을 대표하는 문파로 바로 그 도선국사가 신라 하대에 성립된 동리산문 계통의 선종과 풍수지리설의 집대성자이다.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도선국사는 어머니 최씨(崔氏)가 빨래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해 낳았으나 숲속에 버려졌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살고 있자 어머니 최씨가 도갑사 옛터인 문수사 주지 스님에게 출가 아닌 출가를 시켜 스님의 길을 간 사연이 깃들여 있다. 월출산 도갑사 산 내에는 도선국사가 디딜방아를 찧어 도술조화를 부렸다는 구정봉(九井峰)의 9개 우물 등 도선국사의 이적이 곳곳에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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