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최종걸의 창건설화] 산 내 비밀이 숨겨진 절 내장산 내장사(內藏寺)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12.10 15:14
  • 19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구글+
네이버 밴드
네이버 블로그
네이버 폴라
핀터레스트
URL 복사
   
▲ 내장사를 외호하고 있는 내장산내 신선봉. 사진 제공 내장사
산 내 비밀을 감춰놨다는 뜻을 지닌 내장사(內藏寺)는 백제 무왕 37년인 636년에 영은(靈隱)조사가 영은사(靈隱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영은(靈隱) 역시 신령스러운 영(靈)이 숨어있다는 법명이고 보면 내장사와 그 의미가 다르지 않다.

한국 산사(山寺)의 대부분의 이름이 초기 개창 시와 다르지만, 영은사(靈隱寺)와 내장사(內藏寺)는 그 깊고 깊은 뜻으로 볼 때 비슷한 의미를 그야말로 간직하고 있다.

신선봉으로 오르는 오른쪽 절벽 위에 암굴(岩窟)을 용굴(龍窟)이라고도 하고 그 터에 용굴암(龍窟庵)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임진왜란 당시인 선조 25년인 1592년 7월 1일 전라북도 전주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경기전의 태조 어용과 전주사고에 소장된 왕조실록을 맨 처음 피난시킨 곳이었다고 한다. 비밀을 숨긴 장소라는 뜻인 내장사의 실타래가 풀리는 첫 번째 설화이기도 하다.

바로 그 설화의 주인공인 희묵 스님은 산에 나무하러 가서 달려드는 호랑이를 한 손으로 꼼짝 못 하게 할 정도로 힘이 셌다고 한다. 어느 날은 절 아랫마을에 큰 황소 두 마리가 뿔을 맞대고 싸우고 있었지만, 누구도 말릴 상황이 아니어서 말만 동동 굴리고 있었던 차에 탁발 길에 나선 희묵 스님이 황소 옆으로 다가가 두 소의 뿔을 양쪽 손에 나누어 잡고는 간단히 떼어 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소문을 들은 나이 어린 희천 스님이라는 스님이 힘을 겨룰 속셈으로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갔지만, 힘으로는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희묵 스님이 힘이 센 비법이 있는지를 유심히 지켜봤지만, 특별히 하는 운동도 없는데 어찌 저렇게 힘이 센지가 갈수록 궁금했다.

매일 희묵 스님은 새벽 예불을 끝내면 절 뒷산 중턱 바위틈에서 나오는 샘물을 감로수 마시듯 마시고는 아주 기분 좋게 하산하는 것이었다. 희묵 스님이 물 마시는 바로 그 샘물에 무슨 비법이 있다고 여긴 희천 스님도 마셔보니 과연 꿀맛이었다고 한다. 하여 은사인 희묵 스님 몰래 매일 샘물을 마시자 희천 스님 역시 힘이 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희묵 대사가 상좌인 희천 스님이 자리를 비우는 게 수상히 여겨 찾아보니 바로 그 샘에 가서 물을 마시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에 희묵 스님은 제자가 과연 힘이 세졌는지를 시험하려고 산봉우리에 올라 큰 돌을 아래로 던지자 희천 스님이 스승이 던지는 돌을 받아 차곡차곡 쌓아 산성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희묵 대사는 희천 스님과 승병을 규합, 왜군과 격렬한 교전을 벌인 바로 그 봉우리를 장군봉, 샘물은 장군이 마셨다 하여 장군 샘의 장 군수라고 부르고 있다.

희묵 대사와 희천 스님이 이끄는 승병이 내장산 일대를 굳건히 지키자 왜병들은 다른 길로 돌아 전주로 향하는 낌새를 보이자 전주에 소장 중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진 태조의 사당 경기전을 염려해 태조의 영정과 전주사고의 전적을 옮기는 작전도 펼쳤다고 한다. 야밤에 모셔온 영정과 실록을 두 스님은 신선봉 밑에 있는 천연동굴 용굴암에 옮겨 1년 1개월간 보전됐다가 조정의 명으로 함경도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 옮겨졌다고 한다. 내장산에는 불교와 관계된 서래봉(써래봉)은 달마 조사의 서래설(西來說), 불출봉은 봉우리 바로 밑에 있는 불출암은 커다란 석굴에서 부처님이 나왔다는 것과 내장사 대웅전 바로 뒷산 봉우리는 영취봉이라 하는데 이는 부처님이 설법하던 인도의 영취산 이름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 불출암에는 신비스러운 바늘구멍이 있어 끼니때마다 먹을 만큼의 쌀이 나오고 신도들이 오면 알맞은 양의 쌀이 바위틈에서 나왔으나 하루는 사미 스님이 매 끼니 쌀 푸기가 귀찮은 데다 욕심이 생겨 바위 구멍을 크게 넓힌 뒤부터 쌀은 한 톨도 안 나왔다고 한다.

희천 대사 이후 근대에는 꼭 달마 스님과 비슷했고 도를 깨친 살아있는 부처라 하여 생불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학명(鶴鳴) 선사가 내장사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일으켰다고 한다.

내장사 스님들에 따르면 학명 스님이 세상을 떠나기를 몇 달 전부터 내장사에는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짐승들까지도 선사의 열반을 예감했는지 내장사 뒤쪽에 자리 잡은 석란정에서 밤이면 호랑이가 울었다. 깊은 밤만 되면 내려와 슬피 울고 가는데 몇 달이나 계속됐고 어떤 날은 갑자기 수많은 까마귀 떼들이 몰려와 내장사의 상공을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사라지곤 했다.

학명 스님은 열반을 앞두고 제자인 고벽(古碧) 스님을 시켜 오늘이 마침 정읍 장날이니 얼른 정읍시장에 나가 무명베 4필, 짚신 10켤레, 그 외 상례(喪禮)에 필요한 물품을 알아서 사 오게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손상좌인 다천(茶泉) 스님을 불러 먹을 갈게 하며 달마상을 그렸다. 평소에는 갈대를 타고 강을 건너는 달마 스님의 모습인 절로도강(切路渡江)의 입상을 그렸는데 그날은 좌상만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을 다 그린 학명 선사는 자리에 몸을 눕히고 제자인 운곡(雲谷) 스님과 그 외 불자들에게 원각경을 외우도록 하여 독경 속에 미소를 지으면서 고요히 멸도(滅度)했다고 한다. 때는 1929년 3월 27일 오후 2시로 장에 갔던 상좌가 돌아올 때였다고 한다.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