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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걸의 창건 설화] 한글창제 씨앗이 된 서울 흥천사(興天寺)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12.16 14:34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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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2년인 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흥천사의 중창을 지원한 이후 회향시 손수 흥천사(興天寺)라고 써준 사액 현판이 흥천사에 걸려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숭유억불 정책을 표방했으면서도 비운에 간 경처(景妻)인 신덕왕후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세운 왕실 원찰로 조선 시내 내내 왕찰의 면모를 이어온 절이 바로 흥천사(興天寺)이다.

이성계의 경처(京妻, 서울에 있는 두 번째 부인)로 국모 역할을 했던 신덕왕후와 왕자의 난으로 숨진 둘째 부인 아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이성계가 세운 조선 최초의 절이다.

서울시 성북구 흥천사길 있는 흥천사(興天寺)는 또 이성계의 둘째 아들 태종의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여장부 역할을 한 이방원의 비 원경왕후의 한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발원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 흥천사는 한글을 창제하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했던 신미대사와 세종대왕의 인연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이방원의 비였던 원경왕후의 천도재 때 흥천사에 머물렀던 신미대사와 세종대왕간에 인연의 싹이 텃기 때문이다.

사연은 이렇다. 이성계 둘째 아들인 태종 이방원은 전선을 함께 누볐던 아버지가 자신을 왕자로 지명하지 않고 서울 작은어머니 아들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한 계모인 신덕왕후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고 한다.

어느 날 역성혁명 공신인 정도전을 감금 후 왕자로 책봉된 이복동생인 이방석과 이방번을 죽이는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이후 작은어머니와 외척까지 제거한 이후 대권에 오르면서 정릉과 흥천사가 등장하게 됐다.

태조 이성계 서울 처인 신덕고황후 강씨 집안은 고려의 권문세가 집 딸로 함경도 변방의 전선을 지키고 있던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이성계는 함경도 함흥 시골에 향처(鄕妻,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를 두고 있었으나 고려말 북의 여진족과 남쪽 왜구들이 출몰하는 지역의 전선을 오가며 당시 수도인 개경의 권세가들 사이에 이름이 오르내리게 됐다고 한다. 당시에는 고향인 시골에 부인을 두는 향처와 서울에 두 번째 부인을 두는 경처(京妻)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신덕고황후가 이성계의 경처로 훗날 조선을 개국하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신덕고황후는 태조의 경처가 돼 2남(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1녀(경순공주)를 낳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의 향처 한 씨가 이미 조선 개국 전에 세상을 떠나 신덕고황후가 조선 최초로 왕비(현비)가 됐다. 태조 재위 시절 자신의 둘째 아들(의안대군 방석)을 왕세자로 앉히는 등 지지기반을 닦지만, 향처의 아들인 이방원에 의해 첫째와 둘째를 잃었고 태조 5년인 1396년에 세상을 떴다. 그를 위한 능이 정릉이고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한 절이 흥천사였다.

이성계와 경처 강씨부인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계기는 이성계가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매우 말라 우물을 찾았다고 한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아리따운 그 고을의 처녀에게 물을 좀 마시자고 하자,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을 띄워 그에게 건네주었다. 태조가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그 처녀는 “갈증이 심하여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돼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을 들은 태조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해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는 바로 그 여인이다.

이 같은 사랑을 받은 계모인 신덕왕후와 왕자로 책봉된 이복동생들을 제거하고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지만, 서울에 탄탄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작은어머니의 외척에 대한 경계심을 버리지 못해 결국 정동(현 영국대사관)에 있던 능을 지금의 정릉동으로 강제이장시켰다. 능에서 묘로 격하하며 심지어 정릉에 있던 석물들을 청계천 다리 공사에 쓰기도 했다. 지금의 청계천 광통교 밑을 지나가다 보면 광통교 돌다리나 벽돌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정동 정릉에 있던 석물들이다. 정릉을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그곳의 마을이 능 이름을 따서 정릉동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및 흥천사 사적기 등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사랑했던 여인 신덕왕후를 좀 더 가깝게 두기 위해 경복궁 인근에 정릉을 조성하고 가까운 거리인 지금의 흥천사에 왕비의 명복을 발원하기 위해 1396년에 착공해 1397년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으로 창건했다.

이듬해인 1398년에는 왕명으로 절의 북쪽에 대규모의 사리전을 세웠다. 이후 세종 시절에는 사리전을 중수하면서 조선 초기의 고승인 신미대사(1403-1480)가 태종의 왕비인 원경왕후 49재 때 첫 인연을 맺는다.

흥천사는 도성 안에 있었던 대찰로서 1424년(세종 6년)에는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가 됐는데 현재 조계종 최초의 총본산으로 격상됐다. 1429년(세종 11년)에는 왕명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고, 1437년에 다시 사리전을 중수하면서 이 절을 관청 건물처럼 정기적으로 보수 수리하도록 법제화했다. 이 처럼 흥천사는 창건 이후 억불의 시대적 조류 아래에서도 왕실의 지원과 장려를 받으며 꾸준히 법통을 이어갔다. 왕실의 제사나 왕족이 병들면 치병을 위한 기도가 이뤄졌고, 가뭄에는 기우제를 열기도 했다.

여느 절처럼 전쟁과 화재 등으로 소실과 중수를 거치는 동안 정조 18년 1794년에 새롭게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고종 2년인 1865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대방과 요사채를 짓고 절을 중창한 뒤 다시 흥천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때 대원군이 손수 흥천사(興天寺)라고 써준 사액 현판이 흥천사에 걸려있다.

1885년 대방을 중수하고, 1891년에 42수 관음상 봉안, 1894년에 명부전을 잇따라 중수했다. 흥천사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5세 때 쓴 글씨가 남아있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난 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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