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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걸의 창건설화] 결초보은과 국혼 천도 도량 서울 진관사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12.23 14:08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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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륙재가 열리고 있는 진관사 경내 모습. 사진 제공 진관사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 진관사(津寬寺)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이자 국찰(國刹) 역할을 했다.

고려 시대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나라를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한 사연은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진관사는 서울 은평구 진관길 73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사찰로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걸쳐 나라를 위해 순국한 이들의 혼을 달래는 수륙재(水陸齋)를 왕실의 주관하에 행했던 국찰이었다.

진관사 사적기에 따르면 진관대사와 현종의 사연은 이렇다. 경종의 왕비인 헌애왕후(獻哀王后 964~1029)는 그의 아들 송(誦)이 왕위에 올라 목종(穆宗)이 되었을 때 천추태후(千秋太后 獻哀王后)가 돼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동안 권신이자 외척인 김치양(金致陽)과 몰래 정을 통해 사생아를 왕위에 옹립하려 목종을 폐위시키려 했다고 한다. 이런 정쟁(政爭) 가운데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헌애왕후의 동생인 헌정왕후(獻貞王后)의 아들인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자 천추태후는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해 목종에게 참소해 살해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대량원군을 다시 진관대사(津寬大師)가 혼자서 수도하는 삼각산(三角山)의 한 암자로 유배 아닌 유배를 시켰다. 암자에서 수도 중인 진관대사는 대량원군의 신변이 불길하다고 여겨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는 그 안에 12세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자객으로부터 위험을 피하게 했다고 한다.

천추태후의 섭정과 김치양의 권력 횡포로 1009년 무신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 순을 제8대 현종(顯宗)으로 왕위를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진관대사였다. 진관대사는 대량원군이 3년 동안 피신 시절 그를 보호하고 지켜냈기 때문이다. 대량원군은 자신의 생명을 3년간이나 지키고 보호해준 진관대사에게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神穴)이라 하고 절 이름을 신혈사(神穴寺)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고, 왕위에 오른 현종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神穴寺)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말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津寬寺)라 했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진관사의 창건 불사는 현종이 즉위한 1011년 가을에 시작해만 1년 동안 공사해 1012년 회향했다고 한다. 이후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해 선종 7년인 1090년 10월에는 선종(宣宗)이 진관사에 직접 와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열었고, 숙종 4년인 1099년 10월에는 숙종(肅宗)이, 예종 5년인 1110년 10월에는 예종(睿宗)이 진관사에 순행하는 등 역대 왕들이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찰(國刹) 역할을 했다.

고려 이후 수도를 개경에서 서울로 옮긴 조선 시대에도 진관사는 국혼을 위로하는 도량으로 거듭났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7년 고려 왕실의 명복을 빌고 중생을 복되게 하도록 진관사에 직접 행차해 수륙사(水陸社)를 세우고, 수륙재 근본 도량(水陸齋根本道場)으로 지정했다.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과 왕조 개편에 따른 불안정한 국민 정서의 동요를 막기 위한 차원이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있는 고혼(孤魂)의 천도를 바라는 불교의 중생구제와 화합을 발원하는 불교 최고의 의례다. 태조에 이어 태종 역시 1413년에 진관사에서 아들인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고, 진관사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가 열려 조선 왕실의 수륙도량으로서 고려에 이어 조선에도 국찰(國刹) 역할을 했다. 조선 600년 이후 지난 2013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제(國行水陸齋)'로 지정됐다.

특히 세종 3년인 1421년에는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를 올린 이후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정례화하는 한편 세종 24년 1442년에는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학업에 전념토록 했다.

주목할 부분은 2009년도 5월 26일 칠성각 내부해체 과정에서 칠성각의 불단(佛壇)과 기둥 사이에서 부착된 한지로 된 큰 봉지를 떼어내자 보자기처럼 싸여 있는 태극기, 독립신문 등 20여 점의 독립운동 관련 유물들이 발견됐다. 발견된 사료들은 진관사에 주석했던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이 1920년 초, 일제에 체포되기 직전 긴박한 상황에서 비밀리에 진관사 내의 한적한 건물(칠성각)의 벽 속에 숨겨 놓은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6·25 때 국찰 역할의 면모는 온데간데 없이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만 남아 폐허나 다름없었던 것을 1963년 비구니 최진관(崔眞觀) 스님의 재건 불사로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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