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 분쟁과 일본에 대한 수출규제가 풀리지 않은 가운데 국내 간판급 기업이 미국에서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미 합병된 회사의 독과점을 심판하는 유럽에 쫓아가서 합병하지 말라고 하는 등 국내 기업 간의 싸움이 스스로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된다.

이런 가운데 나이스신용평가와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등 국내 신용평가 3개사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최근까지 무보증 사채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된 기업은 55곳(중복 포함, 유효등급 기준)으로 지난 3년만에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신용등급이 낮다는 것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기업의 상황이 좋지 않아 회사채를 발행할 때 이자 부담이 더 늘어난다는 좋지 않은 신호이다.

등급 하향 기업 수를 연도별로 보면 2015년엔 160곳, 2017년 45곳, 2018년 37곳으로 줄었으나 올해 55곳으로 다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간판 기업인 현대차가 발행한 무보증 사채 또는 기업 등급이 최상위 등급인 'AAA'로 평가받다가 신용평가 3사 모두에서 'AA+'로 한 단계 등급이 떨어졌고, 기아차도 '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아졌다. 두산중공업과 LG디스플레이도 신용평가 3개사가 모두 신용등급을 한 단계씩 낮췄다. 대기업 상황도 여의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가운데 전기차 배터리 세계적인 회사인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서 벌이고 있는 전기차용 배터리 관련 소송에서 LG화학이 요청한 '조기 패소'를 두고 또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보도됐다.

ITC는 지난 10월 SK이노베이션이 영업비밀 침해 소송과 관련한 중요 정보를 담고 있을 만한 문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LG화학의 요청을 받아들여 포렌식 조사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이번 싸움에서 SK이노베이션이 패소하면 관련 제품에 대한 미국 내 수입금지 효력이 발생하고 이 경우 북미 지역 전기차 배터리 공급에 차질이 생겨 자동차 산업의 피해가 불가피하다고 한다. 미국이 SK이노베이션의 자국 내 배터리 생산 공장을 더 늘리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미국 국내에서조차 관심거리라는 것이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세계 전기차업계의 배터리 주 공급회사라 자동차 업계는 국내 두 기업의 싸움 결판이 어떻게 전개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이 같은 국내 기업 간 문제가 유럽연합(EU)집행위에서도 심판받고 있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합병이 유럽조선업에 독과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싱가포르에 이어 EU가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인수합병에 대해 2차 심층심사를 하기로 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경쟁분과 위원회는 17일(현지시각)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우조선해양 인수합병 1차 일반심사에서 결론을 내지 못해, 2020년 5월 7일까지 90일간 2차 심층심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양 사의 합병이 선박 발주 시 가격을 높이거나, 회사 선택권을 줄이거나, 혁신이 줄어드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본심사인 셈이다. 대우조선해양 노동조합 측은 이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유럽 현지에서 시위를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유럽연합은 초대형 컨테이너 화물선이나 LNG선을 발주하는 선사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독과점을 규제하기 위한 기업결합 심사가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0년 동안 국내 대형조선소들은 이들 선사가 발주한 해양플랜트를 포함한 시추선, LNG 등 선박 수주를 위해 저가 경쟁에 뛰어들면서 수주할수록 손실이 발생하는 후유증에 시달려왔었다. 그 때문에 정부를 포함한 국내 금융사들이 조선산업 구조조정에 나서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인수합병을 승인했지만, 유럽연합은 두 조선소의 합병이 독점적 지위를 갖는지 등을 따지는 결합심사에 나선 것이다.

여기에 대우조선해양 노동조합이 소속된 민주노총과 시민단체까지 나서 합병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겠다는 등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어 힘을 합쳐도 모자랄 국내 기업 간 이전투구는 볼썽사나운 싸움판으로 변했다.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 분야와 조선소 분야에서 세계적인 국내 기업들이 벌이고 있는 '너 죽고 나 살자'식의 싸움을 반기는 이는 누구인지 살펴보기 바란다. 국내 경기 상황이 만만치 않은 지금 시점에서 국내 기업들간 출혈경쟁이 자칫 외국 경쟁업체들에게 좋은 기회를 넘겨 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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