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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걸의 창건설화] 항일과 민족종교를 품은 서울 조계사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12.26 16:06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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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사 대웅전내 3존불. 사진 제공 조계사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인 조계사는 항일투쟁과 민족종교를 품어 안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계사는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10년 조선불교의 자주화와 민족자존 회복을 염원하는 스님들에 의해 각황사(覺皇寺)란 이름으로 창건됐다. 당시 각황사는 근대 한국불교의 총본산으로 한국불교 최초의 포교당, 일제 강점기하 최초의 포교당이자 사대문 안에 최초로 자리 잡은 절이었다.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으로 인도의 계급제도인 수드라급으로 격하시킨 유교가 일제에 의해 사멸된 이후 절이 처음으로 도성 안에 창건된 것이다.

현재의 조계사 자리로 옮긴 건 1938년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옮기는 형식을 취했다.

태고사를 창건하면서 현 대웅전은 전라북도 정읍에 있었던 보천교(普天敎) 십일전(十一殿)을 해체 복원시켜 온 것이다. 이후 왜색에 찌든 한국불교를 1954년 일제의 잔재를 몰아내려는 불교 정화 운동이 일어난 후 태고사에서 조계사로 개칭했다.

조계사(曹溪寺)에서 조계(曹溪)라는 뜻은 불교 선종 제 5조 홍인 스님의 제자로 남종선의 시원인 제 6조 혜능을 상징한다. 이전 태고사라는 뜻은 1937년 3월부터 1938년 10월 사이에 각황사를 현 위치로 옮기는 불사를 마무리한 뒤 삼각산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해 붙여진 이름으로 태고사는 태고 보우 국사의 법맥을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조계사는 1962년 이후 대한불교조계종의 직할 교구 본산으로 또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사찰이라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조계사 대웅전은 1938년 10월 25일 전북 정읍에 있던 항일 민족종교인 보천교 십일전(十一殿)으로 전통 건축 양식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의 일본 불교와 차별하기 위한 한국 현대 불교를 대표한다는 항일의 상징성을 띠고 있다.

보천교(普天敎)는 차경석(車京石)이 창시한 증산교(甑山敎) 계열의 항일 신흥종교로 1880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차경석이 동학혁명 당시 동학 접주(接主) 중의 한 명으로 관군(官軍)에 의해 처형당한 차지구(車致久)의 장남이 창교했다. 차경석은 증산교를 창교한 강일순(姜一淳 호 甑山)을 만난 뒤로는 제자가 된 이후 강일순이 죽자 그의 제자들과 함께 다시 규합, 1911년 선도교 이후 태을교(太乙敎)로 창교 후 1921년에 보천교로 개칭했다.

차경석은 천지개벽의 문로(門路)가 자기에 의해 열린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동방연맹(東邦聯盟)의 맹주가 될 것이고 조선은 세계통일의 종주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전국의 신도를 60방주(方主)의 조직으로 묶고, 55만7700명에 달하는 간부를 둘만큼 교세가 확장됐다고 한다. 이를 의식해 1926년에는 당시 일본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직접 정읍 본부로 찾아와 면담할 정도였다고 한다.

1921년 차경석은 일본 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 속에서도 경상남도 덕유산 기슭의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의 천제(天祭)를 올리고 국호를 ‘시국 時國’ 교명을 보천교(普天敎)를 창교했다.

1922년에는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 대규모 교당을 신축할 때 소나무를 백두산의 원시림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한때 신도가 600만명에 달할 만큼 세가 확산했다고 한다.

민족 종교색을 띈 보천교의 세력이 확산했지만 1936년 교주인 차경석이 죽자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점령군 사령부인 조선총독부는 ‘유사종교 해산령’을 선포하면서 보천교를 해체했다.

바로 조계사 대웅전은 그 해체된 보천교 본당 십일전을 이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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