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자의 사표였던 춘성 스님. 사진 네이버 캡처
절을 절답게 빛내는 건 그곳에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풍수가에서는 비산비야(非山非野)에 대혈(大穴)이 있다지만 큰 산엔 큰 스님이 있다. 바로 그 도봉산 정상에서 8부 능선에 있는 망월사(望月寺)는 근세기까지 큰 스님들이 치열한 수행을 했던 곳이라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망월사 사적기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 8년째인 639년에 해호화상(海浩和尙)이 왕실 융성을 발원하고자 창건했다. 망월사라는 절의 이름은 대웅전 동쪽에 토끼 모양의 바위가 있고, 남쪽에는 달 모양의 월봉(月峰)이 있어 마치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의 태자가 망월사에 숨었다고도 한다.

망월사(望月寺)에는 조선이 청나라에 치욕적인 수모를 겪고도 이번에는 조선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또 청병을 요청해서 온 파병군 사령관인 원세개가 쓴 현판도 화젯거리다. ‘주한사자원세개(駐韓使者袁世凱) 광서 신미중추지월(光緖 辛未仲秋之月)’이 望月寺 현판에 쓰여 있다. 광서는 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를 말하고 1891년 가을에 원세개가 쓰다는 뜻이다.

원세개는 청말 북양대신 이홍장의 총애를 받아 23세의 나이로 조선의 군사 반란인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청군(淸軍) 사령관으로 1882년 급격한 개혁정책에 반대한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왔다. 청나라는 원세개를 앞세워 명성황후 등 민씨 일파를 동원해 조선 왕실을 좌우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개화파는 일본과 손을 잡고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조선의 파국을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일본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한 청과 아직은 독자적으로 조선을 지배할 힘이 부족했던 일본은 톈진조약을 체결, 조선에서의 청·일 양국 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서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린다는 그야말로 청나라와 일본이 지금처럼 양분하는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1885년 조선 주재 총리 교섭 통산 대신이 된 원세개는 서울에 주재하며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는 동안 망월사에서 북경의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한 후 망월사라는 현판을 썼다고 한다. 망월사 기도 덕분인지 원세개는 청나라로 돌아가면서 조선 여인 세 명을 첩으로 삼아 데려간 한 여인 낳은 아들이 바로 노벨물리학상 후보까지 올라간 물리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숱한 사연이 깃든 망월사를 수행 근본 도량으로 일으켜 세운 용성, 동산, 춘성 스님들의 수행담은 큰 산처럼 전설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 스님은 근현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수행이란 무엇인가를 망월사에서 정진을 통해 보여줬다. 일제 강점기에 3·1 독립운동 33명 중 만해 스님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했던 백용성 스님이 1905년 선원을 개설한 것을 계기로 여기에서 수행한 제자인 석우, 동산, 고암스님 등 3명은 후에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됐다.

동산 스님은 은사인 백용성 스님이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되자 망월사와 종로 대각사를 오가며 스승의 옥바라지를 하면서도 수행자의 사표가 됐다.

이에 뒤질세라 무애와 기행 그리고 자비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춘성 스님도 망월사의 격을 드높인 근현대의 걸출한 스님으로 회자하고 있다.

바로 그 춘성 스님도 스승인 만해 스님이 용성스님과 함께 독립운동으로 인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자 동산 스님과 함께 옥바라지하면서 감옥에서 고생하는 스승들을 생각하며 겨울에도 난방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춘성 스님은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이불이 '부처를 멀리한다(離佛)'라는 뜻이 있다고 하여 평생 이불을 덮지 않고 수행했다고 한다.

이 같은 스님의 수행담을 시험하기 위해 스님들이 법거량을 청하러 와서 “스님 백척간두에 진일보하면 어떤 경계가 펼쳐지나요?”라고 묻자, 춘성 스님은 “야 이 씹할자식아 내가 떨어져 봤어야 알지!”라는 할을 했다고 할 만큼 거침없는 숱한 기담을 남겼다.

스님이 계룡산의 도인이라 칭했던 석두 스님과 돌로 굴을 만들어 선정삼매에 들었을 때 폭우가 쏟아져 물이 턱밑까지 차오르자 석두 스님에게 “야이 자식아 물찬 지도 모르고 자빠져 자고 있었냐?”라는 법담은 치열한 수행담의 깃털에 불과하다.

이 같은 스님의 수행과 기담을 익히 알고 있었던 육영수 여사가 본인 생일날 춘성 스님을 초대해서 법문을 청하자 “아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제 어머니 그것에서 응애하고 태어난 날이로다!”라고 하자 서슬이 시퍼런 차지철 경호실장도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박정희 대통령은 “아 저리 큰 스님이 계셨단 말인가?” 하고 스님을 그 후로도 몇 번 더 초대해서 법문을 들었다고 한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제자들이 스님 다비후 사리가 안 나오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하자 “내가 신도들을 위해 살았냐?”라고 사리 걱정하는 제자들을 나무랐다고 한다.

다비(茶毘)한 재를 몽땅 바다에 뿌리라고 유언해 제자들은 다비후 매우 크고 영롱한 사리까지 서해바다에 뿌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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