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가 마치 물 흐르듯 수기를 불어놓은 수체(水體) 글씨를 현판으로 단 천은사 일주문. 사진 제공 천은사

한때 남방제일선찰 천은사(泉隱寺)는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70번지 지리산의 서남쪽에 있다.

조선 시대 천은사 중건 당시 지어진 극락보전 상량문에 따르면 당 희종 건부2년인 875년에 연기(도선국사)가 가람을 창건하였고 후에 인도 출신 덕운 스님이 증수(唐 僖宗 乾符二載 緣起相形而建設 德雲因勢而增修.....)했다는 기록이 있다.

창건주 연기는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의 별호인 점으로 미루어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덕운 스님이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이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도선국사가 중국 유학 시 일행 선사로부터 3천8백 비보 사찰을 중건 혹은 창건토록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신라 조정에서 신라 곳곳에 사찰과 탑을 건립했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도선국사는 당나라로 유학 가서 밀교 수행을 했던 일행(一行) 스님으로부터 풍수를 배웠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지만 추정뿐이다.

음양풍수설의 대가로 알려진 도선국사는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시조로 알려질 만큼 곳곳에 사찰 창건기록들이 있다.

도선국사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 배경은 헌강왕 1년인 875년에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예언한 대로 송악에서 후에 고려를 개국한 왕건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덕분에 태조 왕건 이후의 고려 왕들은 도선국사를 존경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천은사는 더욱 번성하여 충렬왕 때(1275~1308)에는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 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는 등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혜정선사(惠淨禪師)가 소실된 가람을 중창하고 선찰로서의 명맥을 이끌어 가다 숙종 5년인 1679년에 단유선사(袒裕禪師)가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절 이름도 감로사(甘露寺)에서 천은사(泉隱寺)로 개칭했다고 한다.

이후 영조 50년째인 1774년 5월에 혜암선사(惠庵禪師)가 화재로 소실되었던 전각을 중수하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 지금의 가람은 대부분 이때 복원된 것으로 사적기는 소개하고 있다.

감로사(甘露寺)에서 천은사(泉隱寺)로 바뀐 사연은 이렇다.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泉)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이 무서워하자 한 스님이 구렁이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泉隱寺)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지만, 절에는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가 마치 물 흐르듯 수기를 불어놓은 수체(水體) 글씨. 사진 제공 천은사

이 시기에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에 화재가 잦다는 이야기를 듣고 비방을 썼다고 한다.

이에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한 필체(水體)로 ‘지리산 천은사(智異山 泉隱寺)’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하여 일주문 현판을 이광사가 써준 글로 달았더니 신기하게도 이후로는 화재가 일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의 고요한 시간에 일주문에 귀를 기울이면 현판 글씨에서 신운(神韻)의 물소리가 연연히 들린다고 한다.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