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훈 박사(서경대학교 나노융합공학과 학과장)

자동차를 만들어 본 연구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국가경쟁력을 높이는데 기여할까, 자동차를 운전할 줄 아는 연구원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국가 경쟁력을 높일까?

막 실험실 생활을 시작한 학부 4학년 당시에 공중파 뉴스에도 보도되었던 꽤 큰 실험실 폭발 사고가 있었다.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은 대피하고, 생전 처음 보는 화학 소방차도 출동했고, 교수님들은 유독한 화학물질에 노출되면 몸에 해로우니 1층에서 학생들의 차단하고 대피하는 학생들 중에는 ‘정자 꼬리 잘린대. 얼른 도망가자!’ 하면서 킥킥대는 친구도 있었다.

지금은 은퇴하신 학부 지도교수님인 이덕열 교수님이 맞은 편 건물 연구실에서 뛰어나와 지나가셨다. 그 실험실 대학원생 형들에게 물으셨다고 한다. “안에 사람 있나?” “네에..” 채 설명해 드리기도 전에 하얀 연기로 앞이 보이지 않는 실험실 안으로 들어가셨다.

연구원 한 명을 업고 나오셨는데 그 분이 “안에 한 명 더 있다.”고 하니 지체없이 뛰어들어 가셔서 한 명 더 업고 나오셨다. 통제선 밖의 학생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했지만 실은 그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사람을 먼저 생각한 교수님의 행동에 압도되어 버렸다.

하얀 와이셔츠에 묻은 핏자국은 아직도 가슴 속에 그보다 더 붉을 수 없는 붉은 색으로 조각되어 남았다. ‘같은 상황이 오면 너도 나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 후 6년쯤 지난 박사과정 때, 연구소에서 비슷한 사고가 날 수 있는 가스누출이 있었는데, 가장 먼저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도망가려던 몸을 돌이켜 가스누출을 막고 더 큰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가 대물림된 것일까.

스승님의 숭고한 가르침의 백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공학분야 연구를 하다 보면 이런 큰사고를 수습한 이야기는 마치 군대 이야기처럼 엔지니어들의 계급장이 된다.

안전 관리 부서와 안전 장치가 충분한 대기업에서의 경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크고 작은 사고와 부상이 엔지니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 3D 직종이라고 이야기하는 반도체 엔지니어들도 감기 바이러스 하나 없는 클린룸에서 일한다고는 하지만, 극도로 낮은 습도, 앉고 일어설 때 날리는 먼지를 막으려 항상 서서 일해야 하는 작업환경, 맨홀 덮개 같은 단단한 철 바닥 때문에 디스크, 치질, 건선 등의 질환 중 한 두 가지 이상은 가지고 있게 된다.

일상 생활에서는 접하기 힘든, 그래서 어느 정도 독성이 있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소재나 높은 전력을 다뤄야 하는 거의 모든 분야의 연구개발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개발을 멈추지 않는 엔지니어들은 우리나라의 경쟁력을 견인하는 착한 핵심 집단이다.

그런데 연구개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연구를 어렵게 하는 것은 사고의 위험이 아니라 연구비 사용 규제와 같은 문제들이다.

2016년 12월부터 시행된 ‘국가연구개발 시설·장비의 관리 등에 관한 표준지침’의 골자는 ‘국가연구개발사업으로 구축하는 1억원 이상 시설장비의 구축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하여 국가연구시설·장비심의평가단(이하 “심의평가단”이라 한다)을 구성·운영하여야 한다.’는 것과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정부위탁연구사업 중 3천만원 이상 1억원 미만의 시설장비 구축계획이 포함된 경우 연구개발과제 평가단에서 시설장비의 구축타당성을 검토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설명은 길지만 가격이 3천만원 이상인 장비는 심의위원회를 구성해서 심사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구입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심사에는 ‘중복성 검토’ 조항이 있다. ‘국가과학기술종합정보시스템(NTIS)’과 ‘연구개발 시설·장비 종합정보시스템(ZEUS)’의 데이터 베이스를 근거로 동일·유사 시설장비가 동일지역에 이미 구축된 경우에는 중복되는 장비로 판단된다.

데이터 베이스 상 중복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장비 구입에 대하여 흔쾌히 찬성할 심의위원이 있을까. 아니, 중복성이 있는데 구입을 허락하면 후에 부당한 심사라고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해야 할 상황에서 허락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NTIS상 걸어가면 되는 같은 남동공단에 소속된 업체에 전자현미경이 있으니 중복성 있는 전자현미경 구입은 불허합니다. 가서 쓰시오.’ 라는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말인지 연구 현장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 대학이든 기업이든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자신들의 노하우가 있다.

장비를 공유해 쓴다는 취지는 좋지만, 제조장비이면 특정 제조 공정이, 분석장비이면 시편 조성이 비슷한 장비를 쓰는 경쟁자에게 노출될 위험이 높다는 것을 과제 지원 당국에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대학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지명도 낮은 대학에서도 볼 수 있는 전자현미경이나 X-선 회절 분석기 같은 기초적인 연구장비도 ‘중복성’ 이름 앞에 절대로 과제비로 살 수 없는 장비가 되었다. 이런 장비들을 이용한 분석결과의 질은 사용하는 사람의 경험치와 시편/장비를 다루는 솜씨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연구현장에서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 모두 ‘중복성이 있으니 과제비로 구입이 안 된다.’는 법안을 거슬러 무언가를 구입할 생각도 하지 못한다.

법이 규정하는 범위 안에서 연구비를 사용하고, 혹 사고가 나면 몸을 던져 감당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연구종사자들이다.

같은 요리도구를 가지고 만 가지 다른 요리를 만드는 셰프를 키우기 위해 같은 종류의 요리도구들이 여러 세트 갖추어진 교육공간이 필요하다. 최소한 대학마다 전자현미경 하나씩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중복성’ 여부를 따져야 한다.

반도체 공정과 나노공정의 기본인 플라즈마 장비는 진공챔버와 진공펌프, 장비 프레임만 해도 쉽게 수천만원을 넘는데 1억원으로도 쓸만한 장비를 만들기 쉽지 않다. 그런데 플라즈마 장비 첫 세팅에 참여한 경험은 몇 억원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체득한 연구원을 만든다.

장비를 만들어 본 경험을 가진 대학원생, 연구원을 키워 내는 것이 중요할까, 장비를 다룰 줄 아는 연구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새로운 정치인을 뽑는 새해가 왔다. ‘이렇게 규제하면 예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가 아니라.‘이런 법안으로 인재를 키우면 우리의 미래가 건강해집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리더들이 선출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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