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수정등은 인생을 벌판, 나무, 우물, 칡덩굴로 엮어서 만든 비유이다. 코끼리를 피해 올라간 나무는 사람의 몸이고 아래의 우물은 황천, 칡덩굴은 목숨이다. 황천을 향해 달려가는 이 몸이 칡덩굴에 의지해 잠시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세마리 이무기가 입을 벌리고 있고, 육체의 구성요소인 지수화풍의 네마리 뱀은 죽은 뒤 육체의 기운을 다시 회수해 가기위해서 기다리고 있다. 더욱이 해와 달을 상징하는 흰 쥐와 검은 쥐는 번갈아 가면서 세월을 갉아 먹고 있다는 뜻.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오욕락의 꿀물에 취해 나는 누구인지도 모른체 죽어간다는 비유. 사진 네이버 이미지 캡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 때 각국은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하지만 고구려가 보장왕 때 도교를 수용하려고 하자 고승인 보덕 화상(普德和尙)이 이에 반발, 백제로 망명해서 세운 절이 흥복사이다.

보덕 화상은 백제로 망명후 '대반열반경’을 연구하고 이를 전파하기 위해 백제 의자왕 10년인 650년에 전라북도 김제시 승반길 103 승가산에 승가사(僧伽寺)를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 당시 승가사(僧伽寺)였다가 조선 인조 때 흥복사(興福寺)로 바뀐 사연도 흥미롭다.

백제 땅에 고구려 출신 스님이 창건한 배경은 종교 간 갈등에 반발, 망명해서 세운 절이라고 한다. 보덕 스님은 고구려 평양 부근의 반룡사(盤龍寺)에 주석했으나 당시 왕이었던 보장왕(642-668)은 재상인 연개소문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 도교 일파인 오두미교(五斗米敎)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도교를 수용하자고 한데는 당시 고구려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들고 있다. 연개소문은 혁명적인 개혁을 시도했으나 개혁을 하자니 기존 세력과 깊은 관계가 있는 불교를 대체할 새로운 이념을 도입하고자 중국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도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풀이다. 도교를 수용하려는 국가 정책에 반발해서 불교가 성한 백제로 종교적 망명을 한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보장봉노 보덕이암寶藏奉老普德移庵’ 항목을 할애할 만큼 보덕 화상의 백제 망명 사건은 당시 삼국이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는 점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불교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보덕 스님은 전주 고대산 경복사라는 절에 망명처를 정했다고 한다. 경복사 내에는 ‘공중으로 날아서 온 암자’라는 뜻의 비래방장(飛來方丈)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이는 보덕 스님이 고구려 반룡사에서 전주 고대산으로 방장을 옮길 때 신통력을 발휘해 공중으로 날아 옮겼기 때문이라는 설화도 남아있다. 그 보덕 스님은 이후 김제시 승가산에 승가사를 창건한 것으로 사적기는 소개하고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6.25 등을 거치면서 승사가도 폐허나 다름 없었지만 다행히 석조 미륵입상만은 남아있다. 뒷동네 이름이 승방(僧房), 앞산 이름도 승방산(僧房山), 대웅전이 기대고 있는 산 이름도 승가산(僧伽山), 보덕 화상 당시의 절 이름도 승가사(僧伽寺)로, 지명으로 봐도 당시 상당한 규모임을 추정된다.


창건 당시 승가사가 흥복사로 바뀐 건 조선 인조 때이다. 조선 인조 때 김제에 흥복(興福)이라는 사또가 가진 수탈과 횡포로 백성들의 원성이 잦았다고 한다. 어느 날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리를 건너다 다리 밑에서 자기를 응시하는 먹구렁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랬다고 한다. 그날 저녁 꿈에 노인이 나타나 ‘네 이놈, 흥복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느냐? 하면서 꾸짖은 모습을 보니 노인은 머리에 구렁이 탈을 쓰고 검정 옷을 입고 있었다. 겁에 질린 흥복이 “당신은 누구요?” 하니 나는 오늘 네가 본 다리 밑 먹구렁이다“라고 하면서, ”이제 이 탈을 나 대신 네놈이 써야겠다“하면서 노인은 머리에 쓴 구렁이 탈을 벗으려고 했지만, 탈이 벗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착취와 수탈을 일삼은 남편을 대신해 부인이 인근 마을 주민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온 공덕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모면했다는 설화다. 꿈을 계기로 흥복 사또는 자진의 탐욕을 깨닫고 자신의 전 재산을 폐허로 방치된 승가사를 다시 짓고 이름도 흥복사로 개칭했다고 한다..

폐사나 다름없던 절을 근래 들어 월주 스님에 이어 도영 스님이 복원하는 동안 당대의 선객 전강 스님이 선원의 조실로 있을 때 박완일 스님이 안수정등(岸樹井藤) 선문답을 했던 곳으로도 알려졌다. 전강 스님은 찾아온 효봉스님의 상좌 박완일 스님에게 “안수정등시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으니, 박완일 스님은 “꿀만 먹겠습니다.”라는 반사적인 답에, 전강 스님은 “아직 더 참선 공부를 해야지만 10년 참선한 수좌보다 낫구나.”라고 격려하면서 “나는 달다.”라고 하겠네! 라는 선문답을 나눴다고 한다.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꿀만 먹겠습니다.’와 ‘달다’라는 선문답을 주고받은 사연도 흥복사에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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