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이암에서 이성계가 백일기도 후 답이 없자 환희담에서 목욕재계 후 3일을 더 기도할때 동자승이 나타나 한담을 나누고 난 이후 그 동자승이 바로 부처였다는 것을 깨닫고 바위에 ‘삼청동(三淸洞)’이라는 글을 새겼다. 이에 태인 현감이 임금이 썼다해서 어필각(御筆閣)을 세워 '삼청동(三淸洞)비를 보존중이다. 사진 제공 상이암

상이암(上耳庵)은 한국 풍수가의 시조 격인 도선 국사가 창건해서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 뜻이 담긴 도량이다. 여덟 명의 왕이 나올 길지(吉地)인 성수산(聖壽山) 제일 명당자리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도선 국사가 전국 곳곳에 해당 지역의 지형과 조화롭게, 때론 지형의 부족한 부분을 보호하려는 비보 사찰을 세운 절 중 상이암은 고려를 개국한 왕건과 조선을 연 이성계가 장차 왕이 될 것을 예고한 기도 영험담이 내려온다.

도선 국사가 창건할 당시에는 도선암(道詵庵)이었지만 이성계가 지리산 운봉지역에서 침략해온 일본 남부 최정예군을 몰살시킨 후 귀경길에 100일 동안 기도 후 하늘에서 곧 나라의 왕이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해서 상이암(上耳庵)이라 개칭했다고 한다.

상이암은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산 876m 8부 능선에 있는 바위 기운이 센 기도 도량으로 알려진 곳이다. 무량수전 맞은편에 마치 바위 여러 개를 정형성 없이 쌓아놓은 듯한 향로봉(香爐峰)은 성수산의 9개 지맥이 마치 여의주를 향하고 있는 구룡쟁주(九龍爭珠)의 형국으로 사적기는 소개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설화를 간직한 환희담(歡喜潭) 비(碑)와 삼청동(三淸洞)비는 도선 국사의 풍수도참이 서려 있다.

때는 고려말, 이성계는 1380년 지리산 운봉 일대서 일명 황산대첩으로 불리는 전투에서 왜군을 괴멸시키고 수도인 개성으로 철군하던 중 무학대사의 권유로 고려 태조 왕건이 가르침을 받은 이곳을 찾아 백일기도를 올렸다.

무학대사가 이성계 장군에게 황산대첩에서 일본 남부군 정예부대를 괴멸시킨 이후 상이암 행을 권유한 이유는 왕건의 건국 설화가 서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도선 국사가 상이암을 두르고 있는 산을 보고 ‘천자를 맞이할 길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라 탄복하여 왕건을 찾아갔다. 왕건은 도선 국사의 뜻에 따라 계곡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던 중 관음보살의 계시를 얻어 기쁨을 감추지 못해 바위에 ‘환희담(歡喜潭)’ 이라는 글을 새겼다고 한다.

바로 그 상이암에서 이성계가 백일기도 후 답이 없자 환희담에서 목욕재계 후 3일을 더 기도했다고 한다. 그때 동자승이 나타나 한담을 나누고 난 이후 그 동자승이 바로 부처였다는 것을 깨닫고 바위에 ‘삼청동(三淸洞)’이라는 글을 새겼다.

바위에 삼청동이라고 새긴 그날 밤에 신광(神光)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서기(瑞氣)가 공중에 운집한 가운데 한 가닥 무지개가 뻗치면서 “이공(李公)은 성수만세를 누리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후 하늘에서 들은 소리처럼 1392년 조선을 개국하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 해서 도선암(道詵庵)을 상이암(上耳庵)으로 절 이름도 바꿨다고 한다.

상이암에는 임금이 바위에 글을 새겼다는 어필각(御筆閣) 내 삼청동비(三淸洞碑)가 있다. 바로 그 삼청동 비각 뒤 바위를 층층이 쌓아놓은 듯한 향로봉은 아홉 마리 용(龍)이 여의주를 향해 강한 기운을 내뿜으며 모여드는 형국으로 지금도 기(氣)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한다.

또 이성계가 100일 기도 중 과일이 흔치 않은 상이암에 장차 절의 과실수 역할을 하게 했다는 수령이 600년이 넘은 청실배나무도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지난 1958년 11월 상이암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법당 상량식이 거행되는 동안 오색 서광(瑞光)이 원형을 그리면서 법당 위 하늘에 서려 있었다는 이적과 기도 영험담이 이어지고 있는 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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