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황진이

▲ 황진이

동짓달 기나 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春風) 니불 아래 서리 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 구뷔 펴리라


■출처 : '우리의 고전시가 2', 나무아래사람(2002).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상대적인 시간 중에서도 언제 올지 모르는 님을 기다리면서 홀로 있는 시간보다 길게 느껴지는 시간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일 년 중 가장 긴 '동짓달 밤'의 그리움은 더욱 사무칠 수밖에 없으리라. 이럴 때 이 외롭고 쓸쓸하고 아무 쓸모없이 긴 시간을 잘라내어 저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하여 저장해둔 그 시간을 꼭 필요할 때 꺼내어 쓸 수 있다면 얼마나 기막힐까.

시인의 기발한 발상은 4차원의 시간을 3차원의 공간에 버무려 "어론님 오신 날 밤"이라는 새로운 시공을 창조한다. 시인은 뛰어난 상상력과 대담하고 정교한 표현력으로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이불'이라는 구체적인 사물로 형상화하여 독자로 하여금 그것을 실감하도록 한다. 시를 읽다보면 시간은 마치 눈에 보이는 물질처럼 잘려지고 넣어지며 펼쳐진다. 또한 우리의 감관에는 차고 포근하고 보드라운 시간의 촉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밤'은 단지 시인과 독자의 상상 속 희망사항일 뿐 현실의 약속사항이 아니다. 현실에서 함께할 배필이 없다는 고독감과 오지 않는 임에 대한 그리움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처럼 치열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였으리라.

황진이가 태어나 살았던 이조시대는 유교 이념이 지배하는 폐쇄된 신분 사회였다. 철저히 남성 양반 중심이었던 사회에서 유일한 예외는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 아버지 양반이라 할지라도 어머니가 천민이면 그 자녀도 천민이 되었다. 그런 사회에서 맹인 관기(官妓)였던 어머니와 양반 진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庶女) 진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길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생이 된 황진이는 타고난 미모와 갈고닦은 재능을 악기 삼아 한바탕 남성 양반 중심의 사회를 희롱하고, 그들의 가식과 위선을 까발려 조롱하였다. 한낱 기생에 불과했지만 절세가인이면서 빼어난 예인, 나아가 뛰어난 시인으로서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주눅들지 않았고, 그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여장부였으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또한 다정다감한 여성이었기에 그리움의 정한만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시가 누구에 대한 그리움의 암유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감정 자체를 억압하고 부인하던 시대에 이처럼 대담하고 세련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시는 우리에게 놀라움과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예부터 '시언지 가영언(詩言志 歌永言)', 즉 "시란 마음속에 있는 뜻을 말하는 것이고, 노래는 말을 길게 읊조리는 것"이라고 하였던 바, 이 시는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린 것으로 악기 연주에 맞춘 노래로 불린 듯하다. 따라서 이 시는 주체적 사유로써 능동적 삶을 살아가려는 한 여성 시인이 지어 부른 한 조각 그리움의 노래였던 셈이다. 시인은 정지한 듯 깜깜한 동짓달 밤의 외로운 시공 속에서 상상의 관현(管絃)을 켜며 그리움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없던 전혀 다른 시공을 창조하고, 기다림의 여지를 마련해둔다. 기다림은 희망이다. 지금은 비록 외롭고 추운 겨울밤이지만 준비하고 기다리면 언젠가 반드시 봄밤과 함께 님이 찾아오리라는.

■황진이(黃眞伊, 기명 : 명월(明月))
△조선 중종 때 1506~20년 전후 개성 출생, 1567년 전후 영면.
△양반인 황진사와 '진현금(陳玄琴)'이라고 불리던 맹인 사이에서 서녀(庶女)로 태어남.
△스스로 기녀가 됨.
△시와 그림, 춤과 노래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 은일사들과도 어울림.
△왕족 벽계수, 승려 지족선사,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 등 남성편력의 일화를 남김.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림.
△대표작으로 '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 '영초월시(咏初月詩)' '만월대회고(滿月臺懷古)' 등 한시 8수와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내 언제 신의 없어' '산은 옛 산이로되' '어져 내일이여' 등 시조 6수가 남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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