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향기 국문학 박사

▲ 사진 = 윤향기 국문학 박사
"별일 없냐? 틈내서 한번 다녀가라. 고구마도 캐놓고, 너 좋아하는 강낭콩도 잔뜩 얼려놨다" "알았어요, 금방 갈께요~"

엄마의 전화를 받고서도 곧장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 혼자 빈집을 지키고 계신데도 그녀와의 상봉은 마음처럼 녹록치 못했다.

그것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날 잡아 아침나절에 번개처럼 달려간다. 그리고 점심만 뚝딱 먹고는 엄마가 광에서 꺼내준 뭉치뭉치의 알곡자루들과 냉동실에서 꺼낸 꾸러미들만 도둑처럼 낚아챘다. 트렁크가 미어지도록 꾹꾹 눌러 실고 있는 내게

"얘야, 먼 길 온 김에 하룻밤 자고가면 안되냐? 네 몸도 피곤헌디"
"엄마! 다음에 와서 자고 갈께. 오늘은 저녁약속이 있어요~"

이렇게 나는 모정을 뒤로 한 채 승용차의 매연을 풍기며 서울로 돌아오고는 했다. 문명을 향해 달음질치던 내가 작년부터 주말농장을 시작했다.

첫해엔 다른 사람이 한번 파종하여 싹이 올라오는 동안 나는 갈아엎기를 세 번씩이나 해야 했다. 비싼 수업료를 물고 나서야 파종에 성공했고, 씨앗들이 자라는 걸 볼 수 있었다. 경험부족이었다.

학습 덕인지 작년에는 상추, 쑥갓, 오이와 고추와 더없이 친해졌고 두 박스의 고구마도 캤다. 벌레구멍 천지인 고구마 잎을 걷어내자 일조량이 적고 비가 너무 내린 탓인지 고구마는 꼭 갓난아이 주먹만 했다.

한 알에는 한여름의 햇살과 바람과 천둥과 나의 한숨이 뒤엉켜 있다. 이 고구마를 통해 오래된 달빛과 구름과 별빛, 이슬방울과 엄마의 노래 소리가 전해진다.

사람의 몸이 순환하는 소우주라면 저 고구마 한 알도 똑 같은 소우주가 아닐까. 그곳에는 밖에서 들어온 요소들로 소란스럽게 형체를 살찌우는 시간과, 첨예하게 자기의 내면에서 인고의 성찰로 내실을 기한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땡볕을 지고 앉아 훅훅 올라오는 지열을 들이키며 김을 매고, 가뭄에는 낑낑 수돗물을 받아다 뿌리고 나서야 그동안 내가 얼마나 부모님의 진한 사랑을 먹고 살았는지 절감하게 되었다. 부모의 은혜를 알려면 아이를 셋을 낳아 길러봐야 하고, 쌀 한 톨이 영그는 데는 만 번의 농부 발걸음이 고여 있다는 말! 이젠 다~아~ 실감하겠다.

오십 견이 어렵게 지나갈 때쯤 삼남매를 다 출가시키고 김포로 이사를 왔다. 어느새 남편과 단 둘이 되었다. 그래도 주중에는 이런 저런 약속으로 부산한 척 하지만 주말에 결혼식이나 영화라도 볼일이 없을 땐 무료해지기 일쑤다.

복잡스러운 삼남매를 키우면서 언제나 내 시간을 가져볼까 속을 태운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집은 고요하기 짝이 없다. 조용히 앉아 책을 읽다가도 다른 집 인터폰 소리가 들리면 올리 없는 아이들이 행여 오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운다.

다시 마음을 내려놓고 책장을 넘긴다. 띠띠띠띠띠 현관문을 여는 전자 키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일까 싶어 읽던 책을 얼른 덮어놓고 후다닥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 나간다. 아무도 없다. 텅 빈 현관엔 그리움이 누른 환청만 덩그마니 가로막혀 있을 뿐.

나는 부모님을 마음의 준비 끝에 보내드린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다음에 와서 자고 가겠노라고 약속한 후, 채 1개월도 안되어 엄마는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다정한 딸 노릇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흙 고랑에 나를 옮겨놓은 지금에 와서야 고향집은 엄마였음을 통감한다.

엄마가 돌아가시자 빈집은 추억과 함께 을씨년스럽게 폐가로 무너져갔다. 감나무 아래에서 그네 타던 계집아이도, 자운영 꽃밭에서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던 계집아이도 이제는 없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대청마루에는 내가 결혼할 상대자로 데려간 남편을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하시던 아버지와 엄마가 앉아 계신다. 생전에 소소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하룻밤을 함께 지내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가 된다. 엄마의 사십 구제가 끝나고 이모에게 들었다.

"내가 삼남매 둔 것이 맞당가?"라고 혼자 말처럼 하셨다는 걸. 어쩌면 내가 머지않아 할 말을 엄마가 미리 하시고 떠나셨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내 고향집 아랫목에는 어머니가 군불을 지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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