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길을 알고 가자- 오늘의 길, 내일의 길

표지판을 보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감을 잡고 나면 다시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다. 이정표에 행선지와 함께 거리가 적혀 있는 경우, 이를테면 '평택 32Km', ‘부산 125Km’ 이런 식으로 표기되어 있을때 과연 평택의 어디까지 32Km가 남았고 부산의 어디까지가 125Km가 남았는지 궁굼해진다.

이 질문에 대해 한 마디로 답한다면 이렇다. 지금 달리고 있는 길이 고속도로라면 이정표에 표기된 거리는 이곳에서 인터체인지까지의 거리이고, 일반국도라면 도로원표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그러니까 일반국도에서 만난 ‘평택 32Km’ 라는 이정표는 이곳에서 평택의 도로원표까지의 거리가 32Km남았다는 뜻이고, 고속도로에 설치된 ‘부산125Km’라는 표지판은 부산 인터체인지까지의 거리가 125Km가 남았다는 뜻이다.

인터체인지야 누구나 다 알 테니 따로 설명할 필요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도로원표라는 건 무엇일까. 각 도시나 지역은 거리를 산정하기 위해 어떤 기준점을 만들어놓는데, 바로 그 기준점 표시가 도로원표이다.

이 도로원표를 설치하는 곳은 도청과 시청, 군청 등 행정의 중심지에 있는 도로교차로 중앙, 이른바 ‘교통섬’ 정가운데다, 또한 이 도로원표는 시나군 등에 한 개만 설치할수 있다. 만일 그 기준점이 교통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을 경우엔 인근에 도로원표를 설치해 놓고 원표가 원래 설치되어야 할 교차로 중앙노면에는 직경 50m 의 황동판를 설치해야 한다.

이때 옮겨 놓은 도로원표를 이표, 원래 원표가 설치됐어야 할 곳에 만들어진 황동판을 진표라고 한다. 진표란 이것이 ‘진짜’ 라는 의미다. 그러니 거리 산정은 도로원표가 옮겨진 곳이 아닌 황동판이 설치된 곳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도로원표가 행정의 중심지 교차로에 서 있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이거나 문화의 중심이 될수 있는 지역이면 이런 곳에 기준점을 정하고 도로원표를 세우기도 한다.

서울의 도로원표 역시 시청 인근에 있지 않다. 현재 서울의 도로원표는 세종로 광화문 교차로에서 가까운 세종로 파출소 앞에 설치되어 있다. 교차로에 원표를 세우지 않은 건교통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원래 원표는 세종로 교차로 중심에 있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 당시 세종로 네거리의 중심에 한반도 18개 도시와의 거리가 표시된 표석을 설치한 것이 그 시초였다.

현재 세종로에 있는 도로 원표에 가보면 서울과 전국53개 도시간의 실제 거리 및 연계상황, 64개 국의 도시와의 직선거리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원표는 세종로 파출소 앞에 있지만 실제 도시간 거리 측정의 원점은 세종로 광화문 네거리의 중심이다.

예전엔 이 광화문이 서울의 중심지였으나 강남 개발 등 거듭되는 행정구역의 확대·개편에 따라 서울의 면적이 점차 넓어지면서 사실 서울의 중심점을 찾는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되고 말았다.

한편 고속도로에서는 중앙분리대 또는 좌우측 가드레일에 기점을 표시한 초록색 숫자판으로 달려온 거리를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경부고속도로의 경우 서초구 한남대교 남단이 기점, 즉 출발점인 여기서부터 거리를 산정했다. 경부고속도로뿐 아니라 이전에는 고속도로 기종점 표시가 서울 중심으로 표기된 경우가 많았고 또 일관성도 없었다.

동서 방향은 대부분 서쪽이 기점이었지만 88고속도로, 경인고속도로는 동쪽이 기점이었다. 그런가 하면 남북 방향의 고속도로는 대부분 북쪽이 기점이었으나 중앙고속도로와 부산-울산 고속도로는 남쪽이 기점이었다.

이런 기점 표시가 서울 중심에서 노선선정 원칙에 따른 이용자 편의중심으로, 또 일관성 있게 정비된 것은 2001년 5월이었다. 남북 방향은 남에서 북쪽으로, 동서 방향은 서에서 동쪽으로 기점을 정하기로 했다.

이런 방침에 따라서 경부고속도로는 기점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변경됐으며 남해고속도로 기점은 부산에서 순천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부산에서 출발한 사람이 경부고속도로에서 중앙분리대에 표시된 ‘150Km'라는 거리 표지를 보면 이는 지금까지 온 거리가 ’150Km'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렇게 기준을 바꾸고 나니 서울사람들이 불평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80’ 이라는 숫자를 보면 바로 서울까지의 거리가80Km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부산 기점이 되다보니 서울- 고속도로 거리 428Km에서 표시된 숫자를 빼야만 서울까지의 거리를 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번거롭다는 것이다. 왜 문제를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었냐는 이 같은 주장은 서울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예전엔 남쪽인 부산에서 서울로 갈 때 ‘서울로 올라간다’ 고 말하고 북쪽인 평양에서 서울을 갈 때도 ‘서울로 올라간다’ 고 했다. 서울 중심의 생각이 반영된 표현들이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일관성 있게 바뀌고 있다. 이른바 ‘패러다임의 변화’ 가 우리 주위 곳곳에서 일고 있는 것이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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