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허형만

▲ 시인 허형만
매화꽃 하롱하롱 떠가고
햇볕도 점점이 반짝이는
섬진강 저 여린 속내사
창포에 머리 풀듯
묏부리만 담궜다 떠나가는
멀고 깊은 지리산은 모르리
 
위로는 곡성이요 아래로는 순천이라
감도 없고 옴도 없는 길
오다가다 잠깐씩 가슴에 품는
알키한 기적소리
해거름녘 설핏해질 때
그 슬픔의 속내사 지리산은 모르리

■출처 : '시안'(2009년 가을호).

▲구례구역에 봄꽃들이 피어나면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곤 합니다. 봄날 꽃구경은 사람구경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모여드는 사람들로 또 하나의 꽃무리를 이룹니다. 잔뜩 움츠러든 올봄에도 어김없이 꽃들은 피어나고 사람들은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꽃무리 가운데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여 꽃축제는 줄줄이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축제가 취소되었어도 꽃들은 저들끼리 돌아가며 여전히 잔치 중입니다. 그제는 산수유마을, 어제는 매화마을, 오늘은 벚꽃마을에 꽃지짐 내음이 가득할 겁니다.

탁한 세상 어딘가에 구례구역 같은 청정지역이 있다는 건 행운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느라 자주 찾아갈 수 없지만 마음속에선 언제나 그리는 곳. 오랜 고생과 고역으로 지치고 병들었을 때에야 우리는 그곳을 찾곤 합니다. 그리곤 '창포에 머리 풀 듯/ 묏부리만 담궜다 떠나'갑니다. 바쁜 세상살이에 그저 '오다가다 잠깐씩 가슴에 품'을 뿐, 결코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욕망은 '지리산'처럼 '멀고 깊어'서 '섬진강'처럼 여려서 슬픈 존재들의 '속내'를 알 길이 없습니다.

'감도 없고 옴도 없는 길'.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우리는 요즘 그 '슬픔'을 조금은 공감하게 되는 듯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연일 많은 사람들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외부와 단절되어 병실에서 치료받거나 자가격리 중입니다. 비감염자라 할지라도 벌써 몇 달째 모임과 왕래를 스스로 삼가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사람간의 만남과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외롭지만 욕심 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사무치게 깨닫게 됩니다.

언젠가 이 재난이 끝나고 사람들이 구례구역 꽃구경을 마음껏 오가는 날이 반드시 오겠지요. 그때까지 우리의 '슬픔'은 좀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재앙 중에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알베르 카뮈. '페스트'에서)을. 그리고 세상에는, 아니 우리나라에는 제 슬프고 아픈 '속내'를 감추고 묵묵히 '묏부리'를 씻기는 '구례구역'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허형만(許炯萬)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순천고, 중앙대 국문과 졸업.
△1973년 '월간문학'에 '예맞이' 발표로 등단.
△목포현대시연구소장, 무등포럼 공동대표,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 광주/전남현대문학연구소 이사장, 계간 '시와사람' 및 '서정과상상' 편집고문, 중국 옌타이대학교 교환교수 등 역임, 현재 목포대학교 국문과 교수.
△전라남도문화상, 우리문학작품상, 편운문학상, 한성기문학상, 월간문학동리상, 순천문학상, 광주예술문화대상 수상.
△시집 : '청명(淸明)' '첫차' '풀잎이 하나님에게' '모기장을 걷는다' '입맞추기' '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 '공초(供草)' '진달래 산천'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 '비 잠시 그친 뒤' '영혼의 눈' '가벼운 빗방울' '불타는 얼음' '황홀' '바람칼' '뒷굽' '그늘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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