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쪽|15,000원|서울셀렉션.
[일간투데이 최종걸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지(코로나19)로 얼룩진 미국 뉴욕의 미술품 골목거리인 소호를 둘러싼 콜렉터 살인사건은 어쩌면 n번방 사건과 닮은데가 있다. 어느시대 어느 곳에서나 색깔만 달랐지 유구한 세월동안 많은 살인 사건중엔 그게 있었다.
윈게이트 가문의 상속녀인 미술품 컬렉터가 자신의 로프트에서 얼굴이 날아간 채로 발견되었다. “제가 아내를 죽였어요.” 남편의 자백이 있었지만 치매성 뇌질환을 앓고 있는 그의 말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부부의 친구인 미술품 딜러 잭과 사립탐정 호건은 이 사건을 조사하며 주로 자칭 예술가인 용의자들을 하나하나 추적해간다.
소더비 경매장, 윌리엄스버그, 휘트니 미술관을 거쳐 리틀 이탈리아에 이르는 소호 곳곳을 누비는 과정에서 그들은 사건의 실마리가 될 범죄적 예술의 현장들을 발견하는데, 도대체 누가, 왜 그녀를 죽였는가? 넘치는 서스펜스와 아슬아슬한 관능미로 예술과 죄악의 경계를 묻는 본격 예술 스릴러다.
‘소호의 죄’를 지은이는 세계적 미술 매거진 《아트 인 아메리카》 편집장으로 일평생 예술계에 몸담아 온 작가 리처드 바인. 그의 경험이 ‘소호의 죄’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래서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자기 표현이나 이야기 전개가 매우 사실적이다. 소호의 전성기를 구가한 예술가들과 그 주변인들의 삶이 작품 속에 오롯이 옮겨져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주인공 잭은 저주와 같은 그 열정의 바탕 위에서 소호의 갤러리와 미술관, 뉴욕의 힙한 레스토랑과 바, 아트페어와 페스티벌, 페티시로 점철된 퍼포먼스 등 뉴욕의 내로라하는 명소와 현장을 누비며 범인을 찾아 나선다.
“요즘의 미술은 부자들을 위한 것이고 아무 의미도 없어요”
현대 미술의 저급한 일면을 꼬집은 펄프픽션 소설 속 살인사건의 중심에는 오로지 돈에 의지해 살아가는 미술 애호가 부부가 있다. 엄청난 부를 자랑하며 소호의 공식 커플로 추앙받는 이들의 결혼생활은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파탄이 났다. 배신과 가식적인 삶에 익숙한 올리버 부인은 어느 날 머리에 총알 두 발을 맞고 살해당했다. 화려하고 호화로운 집과 전시회, 파티, 만찬, 폴록과 워홀의 작품을 뒤로 한 채. 그녀의 추도식에 모인 예술가 집단은 현대 미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미술품 경매장에 모인 큰손들이다. 그들에게 배제된 풋내기 예술가들은 미술계의 지하경제를 전전하다
자칫 포르노 사업가와 손잡고 외설의 ‘예술’을 추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고급 문화로 인식되어온 현대 미술의 저급하면서도 경박한 단면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고귀한 예술의 추악한 이면을 통속소설의 형식으로 비틀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옮긴이 박지선은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번역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나를 지워줄게》, 《마지막 패리시 부인》을 비롯한 소설과 《감각의 미래》,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는 시간》 등 다양한 책을 번역했다.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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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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