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용역비는 아끼지 말라

"용역비는 돈 아끼지 말고 넉넉히 주도록 하라"는 것이 박대통령이 건설부 장관에게 지시한 사항 중의 하나였다. 조사.측량.설계 등의 건설부 장관에게 지시한 사항 중의 하나였다. 조사.측량.설계 등의 기초작업을 완벽하게 해놓아야만 공사비가 절감된다는 사리를 강조한 것이었다.

"주장관도 나에게 조사.측량을 잘 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런데 용역비를 당초의 약속 금액보다 조금 더 달라고 하니까 그건 안되겠다고 거절합니다"

임봉건씨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다.
임사장은 조사 및 설계에 필요한 시간을 ‘넉넉히’ 얻기 위해 박대통령에게 "2월 1일(68년)의 착공(서울~수원간)은 좀 힘들 것 같은데요. 한달쯤 늦추어서 3월1일에 착공하는 것이 어떨까요?"

넌지시 마음을 떠 보았으나 박대통령은 단호한 어조로 일축했다. 그바람에 임사장의 발등엔 마침내 불이 떨어졌다.

"우리 회사의 기술진만 투입해 가지고는 기한내에 도저히 일을 끝낼 가망이 없어 현대건설 쪽의 측량반과 기자재의 지원을 받아서 강행군을 계속했습니다. 서울~신갈리간 23㎞를 우선 착수했는데 지질조사라든가, 삼각측량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실시 되기는 이때가 아마 최초였을 겁니다"

임사장은 계획조사단의 기술반원으로서도 진력한 바 있고, 경부간 첫 공구인 서울~수원구간의 설계용역 업무도 무난히 수행해 냈는데 주원장관도 그를 평하여,
"우리가 외국인 용역단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도 임사장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고 말하고 있다.


(3) 바람이 불면 통장수가 돈 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서울~부산 고속도로의 건설은 그 규모나 제반 여건으로 보아 국가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방대한 사업이었으므로 주무부인 건설부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보다 강력한 행정력의 뒷받침과 각 부처간의 긴밀한 협조체제가 절실히 요망되었다.

이에 자문위원회는 국무위원급으로 구성되는 정책기구로서 대통령직속의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그 산하에 실무기구로서 동 계획조사단을 발족.운영할 것을 건의하고, 그 구성안을 67년 12월6일에 제출, 그후 2차.3차에 걸쳐 수정안도 제출했다.

67년 11월 7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하에 열린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건설부 장관은 도로개발계획을 제시하고, 고속도로 건설 10개년 계획을 설명했는데 추진위원회 구성의 필요성도 동시에 건의했다.

이에 박대통령은 적극적인 찬의를 표시하고,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은 내가 하지.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고 국무총리를 부위원장으로 하는 구성안을 검토해 보시오"라고 건설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이것은 물론 고속도로 건설사업에 대한 박대통령의 비상한 결의를 뜻하는 것이다.

사흘 뒤인 11월10일, 건설부장관은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1안과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제2안을 만들어 박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1안이 제시되기에 이른 것은 당시의 정일권 국무총리가 "대통령 각하께서 위원장이 되실 수야 있겠습니까. 제가 맡겠습니다"하고 스스로 떠맡고 나섰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박대통령도 총리와 국무위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1안으로 양보(?)했다.

67년 12월 13일의 국무회의는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의 규정을 의결, 대통령의 결재를 얻어 대통령령 제3300호로 공포했다(이 규정은 68년 1월 15일 대통령령 3346호로 개정된 바 있음).

이 위원회는 정일권 국무총리를 위원장, 박충훈 경제기획원장관을 부위원장으로 하고 건설.내무.재무.국방.법무.농림.교통.체신.무임소(1인)장관과 국세청장, 경제과학심의회위원(1인).한국은행 총재.외환은행 총재.국회건설위원장.서울특별시장.부산시장.관계도지사 이밖에 민간인 7인을 위원으로 하고 건설부 장관이 간사장을 겸했다. 그리고 이 위원회 산하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실질적인 조산역이 될 ‘동 계획조사단’이 설치되기에 이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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