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만섭

▲ 시인 이만섭
부엌사(史)는 도마가 쓴다
세상에 한 몸 내어 하는 일이라고는
노상 몸에 칼 맞는 일
아침저녁으로 무두질하는 저 잔혹사
태사공의 궁형에 비한들
칼 맞는 도마가 독하다
몸을 내쳐 얻은 음식이 진상되는
그런 도마가 더 질기다
지금은 아내가 깍두기를 담그는 중이다
FM 음악을 틀어놓고 탁탁탁-
거침없이 휘두르는 비검무에
사방으로 나동그라지는 무 조각들
칼의 율격이 고르다
저 수신(修身) 자세히 듣자니
도마가 칼 소리를 받아 삼키고 있다
흡반 같은 밀착이다
피할 수 없을 때 즐기는 거라더니
옛말 허투루 듣지 않고
꿋꿋이 외길을 가며
난전의 차력사처럼 배 훌렁 걷어붙이고
몸에 맞는 칼, 표정도 당당하다
결국 칼이 물러앉는다

■출처 : '시향'(2010년 겨울호).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역발상의 결론을 망설임 없이 내어놓는 품새가 단박에 관심을 끈다. '부엌사는 도마가 쓴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독자는 호기심과 의문을 가지고 시를 읽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뒤이어 그 결론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솜씨 역시 예사롭지 않다. 마치 한편의 무협극이나 잔혹한 역사드라마를 보는 듯 펼쳐지는 단어들에 긴장감이 감돈다. '칼 맞는 일' '무두질' '잔혹사' '궁형'…. 전반부에 펼쳐놓은 이런 단어들을 뒤로 하고, 중반부에서는 느닷없이 '깍두기 담그는 아내'가 나와 딴전을 피운다. 후반부에서는 '난전의 차력사'까지 등장한다. 약간 혼란스럽다. 이 혼란을 단칼에 정리해주는 열쇠 말이 '태사공'이다.

태사공(太史公)은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사마천(司馬遷)의 칭호이다.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생전에 편찬하던 역사서를 완료하라는 유언에 따라 대를 이어 역사서 편찬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이를 중단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소위 '이릉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한무제(漢武帝)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이릉이 대패하여 적에게 투항해 버리고 말았다. 이에 조정대신들은 일제히 이릉을 비난하였고 황제도 진노하여 그의 가족 전부를 옥에 가두었다. 이때 사마천이 나서서 이릉을 두둔했다.

'이릉은 5천 명밖에 안 되는 군사로 적진 깊이 들어가서 몇 만 명이나 되는 적군을 쳤습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그 싸움에서 죽인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릉이 지금 죽지 않고 적에게 넘어간 것은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으로 그는 꼭 공로를 세워서 황상의 은공에 보답할 것입니다.'

그 말에 대노한 무제는 사마천을 궁형(宮刑)에 처했다. '궁형'이란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로 죽느니만 못한 치욕을 안겨주는 혹형이었다.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수치스러워 자살하려고 했으나 포기했다고도 하고,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살기 위해 스스로 궁형을 대신 택했다고도 전해진다. 포기든 선택이든 그가 치욕을 견딘 까닭은 오로지 역사서 편찬의 유업을 완료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고대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역사서일 뿐만 아니라 걸출한 문학작품이기도 한 '사기(史記)'는 그렇게 해서 완성되었다. '세상에 한 몸 내어 하는 일이라고는 / 노상 몸에 칼 맞는 일'인 '도마'처럼 '독하'고 '질긴' 정신으로 살아남아 후대에 남겨졌다.

언뜻 들으면 '부엌사(역사)'는 칼자루를 쥔 사람들이 '거침없이 휘두르는 비검무에' 의해 쓰이는 것으로 들린다. 하지만 '자세히 들(듣)'어보면 '흡반 같은 밀착'으로 '칼 소리를 받아 삼키고 있'는 '도마'의 '수신(修身)'이 들린다. '피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에도 '꿋꿋이 외길을 가며' '표정도 당당하'게 칼을 맞는 사람이 보인다. '역사는 언제나 강자의 편',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과 무관하게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는 믿음으로 피눈물로 역사책을 쓰는 사람이 보인다. 시를 쓰는 사람이 보인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피할 수 없을 때 즐기'면서, 인류 앞에 '진상되는' '음식'을 꿈꾸면서 진실을 기록하는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고 믿고 싶어진다. 태사공도 '사기'의 '열전'에서 '바른 것을 북돋우고, 재능이 뛰어나며, 자신에게 주어진 때를 잃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우는 사람들을 위해 열전을 짓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 위에서는 '결국 칼이 물러앉는다'.

■이만섭

△1954년 전북 고창 출생.
△2010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직선의 방식'이 당선되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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