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희 시인

▲ 시인 유은희
돌담도 늙는지
점점 낮아지고 있다

빈 젖 물고 크는 것들처럼
담쟁이만 무성하다

넝쿨의 내력을 따라가 보면
먼 길 내달리려던 발자국 하나 있다

담장 위에서 번번이 덜미 잡힌 목덜미가 있다

한 발짝만 헛디뎌도 줄줄이 딸려 넘어지는 것들을
끌고 가는 등이 있다

파도치는 담장 기슭으로
아득하게 뻗어 내린 푸른 맨발들

후드득후드득 빗소리로
발 동동 굴러 우는 입들
줄줄이 매어 달고
길 없는 길을 내어 가는 걸음이 있다
구름 길 멀리 내빼지 못한

내 아버지가 있다

■출처 : '떠난 것들의 등에서 저녁은 온다', 천년의시작(2019).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마음을 끈다. '돌담'과 '담쟁이'를 보고 어떻게 '아버지'를 떠올리고, 그 삶의 아픔까지 이해하게 되었을까. 이는 잘 발달한 시인의 유추능력과 공감능력에 기인한 것으로, 연관성 없어 보이는 사물들에서 공통성을 찾아내어 엮는 능력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그의 경험을 느끼고 이해하는 능력이 합쳐져 뭉클한 감동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람과 사물의 감추어진 내력을 읽어내는 시인의 마음눈이 깊고도 성숙하다.

그 중에서도 한때는 없어서는 안 될 만큼 긴요했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퇴락해가는 존재에 대한 시인의 측은지심은 남다르다. 그것은 "늙는지 / 점점 낮아지고 있"는 '돌담'과 이제는 "빈 젖"이 되어버린 '내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낡(늙)은 돌담'과 '빈 젖'의 이미지(image, 심상)를 늙은 '아버지'의 이마고(Imago, 원형심상)와 겹치면서 기존의 아버지상(像)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긍정적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시인 즉 시적 화자가 이해한 '아버지'는 "무성한 담쟁이 넝쿨"의 기원으로서 "먼 길 내달리려던 발자국 하나"이며, "담장 위에서 번번이 덜미 잡힌 목덜미" "한 발짝만 헛디뎌도 줄줄이 딸려 넘어지는 것들을 / 끌고 가는 등"이다. 아슬아슬하고 험난한 세상으로부터 "푸른 맨발들"이며 "발 동동 굴러 우는 입들"인 자식들을 보호 양육하기 위해 "줄줄이 매어 달고 / 길 없는 길을 내어 가는 걸음"이다. 그런 '아버지'에게도 자신만의 꿈과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 사랑 때문에 끝내 "구름 길 멀리 내빼지 못한"분. 그분이 우리들의 '아버지'였다.

한 세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저무는 세대의 낮아진 담장엔 담쟁이만 무성하다. 집단으로 밀려오는 이 담쟁이 넝쿨은 자신의 기원과 내력을 알고 있을까. 사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피조물은 영고성쇠라는 자연의 법칙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후대의 누군가 그 근원을 잊지 않고, 보람찼던 만큼 아름찼던 그 역사를 기억하고 공감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하여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에 다시금 떠올려본다. 위로와 격려는 따뜻한 공감과 이해에서 온다는 것을.

■유은희

△전남 완도 청산도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과, 동 대학원 졸업.
△1994년 '문예사조'로 등단
△2010년 국제해운문학상 대상 수상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
△현재 인문라이브러리, 독서 글쓰기 외 강사 활동 중.
△시집 : '도시는 지금 세일중' '떠난 것들의 등에서 저녁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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