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훈 박사(서경대학교 나노융합공학과 학과장)

방향이 옳지 않다면 지금 즉시 그 고통이나 즐거움을 멈추고 벗어나야 한다. 그 방향성이 미래를 결정한다.

아직 코로나19 국내 감염이 안심할 수준이 아니니 좀 더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나라의 부러움이 되는 자유로운 일상을 통해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가능하다는 모습을 보여주어, 이 기회에 첨단 제품의 세계적 생산기지로 자리 매김할 필요가 있다.

재수를 하던 80년대 말에는 재수생을 ‘죄수생’이라 불렀다. 동네 분들 눈에 띄는 것도 좀 부끄럽기도 했고, 출근 길 러시아워를 피해 앉아서 남산에 있는 재수학원에 가려면 아침 6시 15분에 청량리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재수를 하면 세상을 알고, 삼수를 하면 천하를 알게 된다는 속담이 재수생들 사이에 회자되기도 했지만 고통스러운 재수 1년에 대한 상실감 때문이었을까, 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학부 1학년 때부터 매일 버스를 갈아타던 아침 여섯 시 즈음 도서관에 앉게 됐다.

요즘도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학생들이 면담을 요청하는데, 일단 매일 아침 여섯 시에 학교 도서관에 앉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왜 4년 내내 매일 아침 여섯 시에 도서관으로 출근을 했느냐고 스스로 묻기도 하였는데, 재수 생활을 통해 그 정도 고통을 감내해 내면 아무리 나의 머리가 나빠도 우수한 동기들 사이에서 밀리지는 않을 기초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라고 나름의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성적이 빼어나진 못했지만 과에서 이른바 ‘소스맨’이라 불리며 각종 전공과목 노트와 시험 소스를 제공하는 도서관 죽돌이가 됐다.

"아프지? 내가 애도 낳고 이것도 앓아 봤는데, 이게 더 아파." 두 번째 요로결석이었을 때 도서관에서 자주 보았던 인연으로 학번을 포함한 통성명을 끝낸 간호학과 출신 선배가 응급실 구석에서 진통제를 놓아주며 해주던 말이다.

요로결석은 너무나도 통증이 심해서 ‘하나님 같은 통증이 몰려온다.’고 기억하고 있다. 세 번 요로결석을 겪고 난 뒤 알게 된 사실이지만 거대한 쓰나미 같은 통증은 결석이 몸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머스트(must)였다는 것이다.

고통지수 순위에서도 상위에 랭크되는 질환들을 앓고 나서야 여러 가지 고통 중에 회복을 위해서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피하면 안 되는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치유를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치료의 한 과정일 수 있다. 이가 썩어 앓느라고 아픈 상태와 이의 마지막 상태인 풍치를 뽑고 뼈를 갈아내어 아픈 상태의 고통은 흡사하지만, 그 고통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또 얼마나 판이한 것인가.

충치가 진행되는 동안의 고통은 더 깊은 괴로움을 향해 있지만, 치료 후의 고통은 건강한 삶을 향하여 있는 것이다.

진통제를 놓아주던 간호사 선배가 해산의 고통과 요로결석 통증을 비교한 이유도 꽤 오랜 시간이지난 후에 어렴풋이 알게 됐다. 의료인의 감각으로 두 통증이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묶어낸 것이다.

해산의 과정은 출산 그 차체뿐만 아니라 산후 조리 과정도 어마어마한 통증을 수반한다. 어머니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 아기가 태어난 기쁨 때문에 가려졌을 뿐, 출산을 마친 어머니들은 수 주 이상 일상의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

고통의 방향을 바로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지혜는 대단한 것이 아니고, 일상의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분한 경우가 많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하지 않는 일은 잠시 멈추어 이 고통이 가지고 있는 방향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고통은 회복을 향하여 있는가, 아니면 더 깊은 고통을 향하여 있는 것인가.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드러난 우리 국민들의 위기 대처 능력은 역사 속에 기록된 수많은 고난에서 체득된 것인데, 우리가 지금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가지고 있는 방향에 대한 이해가 국민 개개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잘 하던 일도 멍석 깔아 주면 안 하는 것이 우리 정서인데, 우리 국민이 정부의 시책을 잘 따르는 것 보다는 우리 개개인이 고통의 방향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있기에 코로나19 감염과의 균형이라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해가 전혀 없는 분들도 있어서 해열제 먹고 제주도 일주를 하기도 하고, 감염 경로 추적을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예배 자체가 아닌 소모임에 대한 규제를 종교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하기도 하지만 다행히 전염병이 창궐하게 만들 수준의 몰이해는 아닌 것이 참 감사하다.

국내든 해외든 마스크를 쓰지 않는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해서 마스크를 쓰라고 권하는 사람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것은 그들이 누리는 즐거움, 편안함이 가지고 있는 방향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우리나라의 경쟁적 교육 상황이 즐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강화하는 형태로 발전해 왔지만 방향이 옳다면 이제 즐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내려놓아야 한다.

6,70 년대 우리 부모님들은 아주 먼 미래, 자녀들의 행복을 바라보고 뼈를 갈아 넣어 우리나라의 산업을 일으키셨다.

결국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선택 이전에, 혹은 고통이나 즐거움 속에서 라도 잠시 시간을 내어 이 상황이 가지고 있는 방향성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이제는 좀 더 가까운 미래의 행복을 위해 잠시 시간을 내어 우리가 겪는 고통이나 즐거움이 가진 방향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움직일 때가 됐다. 즐거움의 방향을 바로 판단하는 일도 고통의 방향을 판단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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