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0%대 금리와 함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등 예기치 않은 경제 여건으로 추가 경정예산(추경)이라는 돈 폭탄으로 불어난 시중 유동성의 60% 이상이 가계가 아닌 기업에 흘러간 것으로 나타났다. 가계 대출로 인한 유동성 증가분은 전체 증가분의 20%뿐이었다.

시중 자금이 주택담보대출, 신용대출 등을 통해 가계로 넘어가 부동산·주식 등 자산 투자에 쓰이는 것이기도 했지만 기업들이 그보다 몇 배 더 많은 돈을 대출로 싹쓸이했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기업들이 대출로 확보한 자금의 절반가량을 투자에 쓰기보다 경기가 더 나빠질 것에 대비해 그냥 쌓아두고 있는 것으로 한국은행은 보고 있다.

29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5월 광의 통화량(M2 기준)은 3천65조8천억 원으로 사상 최대 규모이다. 넓은 의미의 통화량 지표 M2에는 현금과 요구불예금, 수시입출금식 예금(이상 M1) 외 MMF(머니마켓펀드)·2년 미만 정기 예·적금·수익증권·CD(양도성예금증서)·RP(환매조건부채권)·2년 미만 금융채·2년 미만 금전신탁 등 곧바로 현금화할 수 있는 단기 금융상품이 포함된다. 이같이 늘어난 통화량의 60% 이상이 기업 대출 증가에 따른 것이고, 주택담보대출을 포함한 가계 대출 증가 부분은 20%뿐이다.

실제로 5월 기준 통화량은 작년 5월보다 292조6천억 원(3천65조8천-2천773조2천억 원) 늘었는데, 같은 기간 기업 대출 증가액이 177조3천억 원(1천373조4천억-1천196조1천억 원)으로 통화량 증가분의 60.6%를 차지했다. 5월 기준 기업 대출 잔액의 작년 동월 대비 증가율은 14.8%로, 통화량 증가율(10.6%)을 웃돌 뿐 아니라 가계 대출 증가율(4.9%)의 거의 3배에 이른다. 한국은행의 예금 주체별 통계를 보면, 기업의 5월 말 예금 잔액은 479조1천853억 원으로 코로나 19 사태 이전 1월 말(432조4천629억 원)보다 46조7천억 원이나 불었다. 같은 기간 기업의 대출 잔액이 1천272조4천억 원에서 1천373조4천억 원으로 101조 원가량 늘어난 것을 고려하면, 극단적으로는 신규 대출액의 절반 정도를 기업이 그냥 현금으로 쌓아놓고 있는 것으로 한국은행은 보고 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5% 수준까지 낮추는 등 코로나 19사태에 유동성 공급을 확대해 소비절벽으로 인한 기업들의 자금 사정에 숨통을 열어주자는 취지에 보면 맞지만, 기업들이 생존을 위한 공격적인 투자를 하지 않고 자금만 쌓아놓고 있는 상황은 달갑지 않은 모양새이다.

유동성 공급의 목표는 기업의 투자와 가계의 소비를 촉진하려는 의도이기 때문에 돈만 쌓아놓고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면 초 단위 경쟁을 하는 경쟁상대에게 뒤처지질 수밖에 없다.


최근 유동성 증가의 가장 큰 요인은 가계 대출이라기보다 기업 대출이라는 점에서 기업들이 중앙은행의 시중 유동성을 늘려서 경기 하방에 대비하려는 취지에서는 맞지만 넘쳐나는 유동성이 기술개발과 투자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통화정책을 왜곡시킬 수 있다.

실제로 기업들은 대출을 늘려서 현금을 쌓아놓고도 대기업들이 지난 코로나 19 기간 동안 1만2천여 명의 임직원을 줄인 것으로 분석됐다. 유통 분야에서만 2천500여 명을 줄였고 건설과 자동차 분야에서도 고용보라는 인력 감축으로 대응했다. 정부가 올해 예산 513조5천억 원에다 코로나 19로 거의 300조 원 가까운 추경을 투입하면서까지 경기 둔화에 나서고 있지만, 기업들은 현금만 쌓아놓고 일자리 창출은커녕 직원 자르기로 대응한다면 정부 정책이 실제 현장에서는 헛돌고 있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업들이 코로나 19를 핑곗거리로 움츠리고 투자를 주저하는 것은 도전과 응전의 기업가 정신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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