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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의 그늘]⑤'존왕양이'에서 '화혼양재'로존왕양이, 제사 통해 천황 중심 국가통합, 서양 배격
화혼양재, 존왕정신 유지한 채 서양식 부국강병 수용
  •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 승인 2020.09.21 11:44
  •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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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에도 시대 말기의 군사학자, 사상가, 교육자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메이지 정부의 제국주의 정책을 이끌었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전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요시다 쇼인이었고 아베와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가 다카스기 신사쿠를 존경해 이름에 같은 '신(晉)'자를 넣었다고 한다. 천황 중심의 부국강병론자 요시다의 영향력이 이제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사진=야마구치현문서관(山口県文書館) 소장 '견본착색 요시다 쇼인상(絹本着色吉田松陰像)에 나온 요시다 쇼인 초상의 일부. 19세기 후반 그림, 작자 미상. WIKIMEDIA COMMONS에서 재인용.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메이지 정부는 전쟁 중에 죽은 이의 혼령에 대한 제사를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 적용했다. 이 때 제사의 대상이 정말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쟁의 희생자냐 아니냐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신조어 '호국영령'은 국가와 국민의 제사 대상으로 재구성된 일종의 '담론상의 전사자'(고야스 노부쿠니(子安宣邦)의 표현)였다. 국가를 위해 존재해달라고 국가에 의해 요청된 영혼인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이러한 영혼의 의미를 정치적으로 홍보하고 교육함으로써 국민으로 하여금 실제로 호국적 정신을 갖도록 몰아갔다. 고야스 노부쿠니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영령을 필요로 한다."

조상 제사를 확장해 국가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제안들은 이전부터 있어 왔다. 가령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는 조상 제사야말로 국가 통합의 근간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사상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걸쳐 일본의 유학 학파인 미토학(水戶學)의 근간이 되었고 미토학은 제사에 의한 통합의 정당성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했다.

미토학의 선구자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 1782-1863)는 제사가 '천하안민(天下安民)'의 최고 가르침이라며 제사를 통한 인민의 통합이 국가 경영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황이 앞장서서 선조를 제사하면 민중도 충효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천황을 공경하는 마음도 더 생겨나리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위기를 극복하고 인민을 통합하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제사론을 가지고 미토학은 '존왕양이', 즉 '왕실(일본)을 높이고[尊王] 오랑캐(서양 문명)를 물리치는[攘夷] 태도'를 내세웠다. 조상 제사를 일본의 기원에 해당하는 신에 대한 제사와 정서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신의 후손인 천황 중심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이다.

하지만 미토학이 내세웠던 존왕양이는 곧 한계에 부딪쳤다. 일본은 서양과의 싸움에서 연속으로 패배했다. 1854년 미국 제국주의 이념의 선봉장 페리 제독이 이끌고 온 군함의 기세에 눌려 강제로 개항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무사들은 그 뒤에도 서양 세력과 대결했지만 1863년에는 영국에, 1864년에는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 연합군과의 교전에서 여지없이 패했다.

그 뒤 무사들은 방향을 선회했다. 서구의 문명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적극 수용해 실질적인 '부국강병'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사상적 스승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다. 그는 막번(幕藩) 체제, 즉 쇼군이 막부를 장악하고 다이묘가 지역(번)별로 자치권을 행사하는 구체제를 벗어나 민중을 규합해 서양식의 무력을 갖춘 통일국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에조치(홋카이도), 류큐(오키나와), 조선, 만주, 대만 등을 정벌해 일본을 확장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배경에서 서로 앙숙이었으면서도 큰 뜻은 같이 했던 사쓰마(薩摩)번과 조슈(長州)번의 무사들이 메이지를 새로운 천황으로 옹립해 혁명을 시도했다. 그것이 메이지 유신이다. 이 혁명가들은 '천황을 정점에 둔'[尊王] 기존 정신[和魂]은 지키면서 서양문명을 적극 모방하고 수용했다[洋才]. 일본은 아시아가 아니라 구라파라는 자의식을 가질 정도였다.

그 핵심 전략이 '존왕'을 앞세운 제사 문화의 확대였다. 지난 호에 본대로 일본의 기원신[아마테라스오오가미, 天照大神]를 모신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의미와 기능을 대폭 강화했고 국가적 전란기에 희생당한 전몰자의 영혼을 위로한다며 야스쿠니신사(靖国神社) 등을 지었다. 제사를 강조하던 유학적 전통을 신도(神道) 안에 흡수하면서 호국영령에 대한 제사를 통해 천황을 정점으로 국가적 통합을 시도했다. 그리고 일단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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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dtoday24@d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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