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치인들, 주변국 비판에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
제사를 통해 죽은 이의 영혼이 산 자를 통합·사회문화 기틀 형성
물론 공식 취지와는 달리 일본을 위해 싸운 전몰자들을 모두 모시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일본 정치의 제국주의화에 부합한다고 판단된 혼령들이 선별적으로 모셔져 있다. 특정한 의도적 해석이 개입되어 창건되고 운영되는 신사라는 뜻이다. 야스쿠니신사 내 전쟁박물관인 유슈칸(遊就館)에는 설립목적을 '영령을 현창하고 근대사의 진실을 밝힌다'고 규정돼 있다.
그러나 '영령을 현창하고', '근대사의 진실'을 밝힌다지만 그것은 일본의 국가주의 정신을 고취시킨다고 해석되었을 때에야 '영령', 즉 '꽃다운 영혼'이 되고 역사의 진실이 된다. 죽은 이가 영령이 되고 제사의 대상이 되려면 역사적 사건에 대한 국가주의적 해석과 그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일본적 역사관이 뒷받침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패전으로 국가적 영광에 상처를 입힌 사건의 희생자들이 국가적 제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가령 2차대전 당시 미국과의 최후 교전이 벌어졌던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죽음은 결코 국가가 제사 지내지 않는다. 국가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으나 수세에 몰려 '개죽음'을 당한 패잔병이나 억지로 떠밀려 자살이라는 이름의 타살을 당한 민간인들은 국가가 제사 지내지 않는다.
야스쿠니신사의 국가주의에도 특정 이념에 입각한 선택과 집중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일본인이 야스쿠니신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가령 오키나와 사람들은 야스쿠니를 별반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일본인 전체가 국가주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호국영령을 높이는 분위기는 일반 삶에도 작용하고 있다. 가령 개별 가정과 마을 단위로 있는 전사자를 위한 묘역이 그 사례이다. 야스쿠니신사 같은 곳에서도 전몰자를 제사 지내지만 개별 가정과 마을 단위에서도 함께 제사한다. 그러다 보니 동일인이 이중, 삼중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같은 전사자에 대한 제사 양식이 불교식, 신도식 등으로 다양해지기도 하지만 종교적 이념 차이로 인한 갈등은 별로 없다. 모두 '호국영령'을 위로한다는 공통적인 사실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한 희생이 불교나 신도와 같은 외적 종교의 차이를 해소시키는 것이다.
나아가 전사자의 묘는 대중에 개방적이며 분위기도 그다지 음산하지 않다. 당사자의 유골이 없어도 공식적 묘석 혹은 묘비를 만들어 공동체적 혹은 사회적 기념의 성격을 부각시킨다. 이런 식으로 전쟁 희생자에 대한 기념 행위는 사회성을 획득해나간다.
앞에서 '제사의 정치학'이라 규정했던 것처럼 이것을 '제사의 사회화' 혹은 '제사의 문화화'라 명명해봄직도 하다. 제사를 통해 죽은 이의 영혼이 산 자의 통합에 영향을 끼치며 사회와 문화의 기틀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주변국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총리가 야스쿠니신사의 참배를 고집하기도 하는 것은 일본의 전통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총리의 야스쿠니신사와 이세신궁 참배는 메이지 시대부터 지속되어 온 '관행적인' 일인 데다가 전후(戰後) 정교분리가 법제화된 이후에도 '종교법인 신도'의 정식 의례가 아닌 개인의 약식 의례를 행하는 정도라면 법 규정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도리어 신사참배를 비판하는 외국이 일본의 내정에 간섭하는 모양새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를 다시 이용하며 신사 참배를 통해 권력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거나 정치적 국면을 전환하려는 보수 정치인의 시도는 종교적 제사를 통해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고 국가적 통합을 도모하려는 전형적인 정치 행위이다. '정치적인 종교 행위'이자 동시에 '종교적인 정치 행위'인 것이다.
물론 '정치적인 종교 행위'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직접적으로 종교 언어를 구사할 수 없는 근대 국민 국가 정치 체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교나 기독교 같은 종단과는 달리 관습 내지 문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국가주의적 차원의 신사 참배는 '종교적인 정치 행위'이기도 하다. 종교의 범주가 다소 달라지기는 하지만 천황제 하의 일본에서는 근대 국민국가의 '정치적 종교행위'는 물론 일본식 '종교적인 정치행위'도 일상화되어온 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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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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