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제, 일본 국민에게 정부 정책 순응·책임회피 유도
강요된 질서, 전쟁 가해 책임에 대한 공식적 반성·사과 외면

▲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직후 '사가의 난'(1874년)을 필두로 '세이난 전쟁'(1877)에 이르기까지 각종 내전이 벌어졌다. 이런 반발은 어느 국민이든 정부 주도의 일방적 정책을 단기간에, 그것도 내적으로까지 체화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황국일신견문지 사가의 사건'(皇国一新見聞誌 佐賀の事件, 1874)에 수록된 메이지 초기까지 활동했던 일본 풍속화(우키요에) 작가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 1839-1982)가 그린 '사가의 난'. 자료=위키미디어(WikiMedia)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일본에서 천황제의 역사는 유구하다.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진무천황(神武天皇) 이래 현재 126대 나루히토(德仁)에 이르기까지 천황의 계보가 끊어진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정도라면 천황제가 현재까지도 일본 국민 안에 온전히 체화되어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속사정은 그렇지만도 않다. 근대적 의미의 천황제는 위(권력)로부터 아래(국민)로 이식된 문화이다. 그러한 이식이 가능하려면 국민이 어떤 형식이든 위로부터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 실제로 권력의 힘때문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일본 국민이 천황제를 '수용'해온 것은 분명하다.

동시에 권력을 '이용'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가령 메이지 시대 이래 군부는 군부대로 천황의 권위를 이용해 침략 전쟁을 국내적으로 정당화해온 측면이 있다. 국민은 국민대로 천황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양심은 괄호친 채 정부 정책에 순응하는 모양새를 취하기도 했다. 내심 전쟁에 동의해놓고도 책임은 결국 천황에 있다며 개인의 책임은 회피하기도 했다.

이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천황제는 일본인의 내면을 분열시켜 사태의 책임을 외부로 돌리게 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는 뜻이다. 천황제가 외적으로는 성공적이었지만 일본인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말도 된다. 국민들도 외적으로는 천황제 하의 질서를 수긍하면서도 속으로는 무관심하거나 무시하기도 하는, 천황에 대한 이중적 정서가 형성되기도 했다.

철학자 구노 오사무(九野收)에 의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천황 신앙은 겉치레(立て前)화되면서 겉 태도(立て前)와 속마음이 표리이체(表裏二體)로 분리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천황에 대한 일본인의 외적 태도와 내적 태도의 구분은 일본인의 '혼네(本音·속마음)'와 '다테마에(立て前·겉 태도)'의 구분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그 구분의 명분이자 근거로도 작용했다는 것이다.

외적으로는 국민이 자발적으로 천황제와 관련된 정치·문화적 행위를 수용하며 생활하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상 그 자발성이라는 것이 위로부터의 억압감을 억지로 감내하는 형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순은 어찌 보면 당연한 측면도 있다. 가령 폐번치현(廢藩置縣·봉건적인 막부시대 번을 폐지하고 전국을 부·현으로 일원화한 1871년의 중앙집권적 개혁 조치)과 같은 메이지 정부의 중앙집권용 정책들때문에 입지가 좁아진 지방의 무사들이 반정부 투쟁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사례가 여럿이다.

1874년 사가의 난(佐賀の乱)이 벌어졌고 1877년에는 일본 최후의 내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이 벌어졌다. 결국은 정부군이 승리했고 세이난 전쟁 이후에는 참전 군인을 대상으로 근대 원호 제도의 시초인 '은급(恩給)'을 시행했다. 천황의 '은혜로운 지급'으로 국가적 통합을 이루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뒤집어보면 반발과 저항은 물론 은급 제도도 국민에게 정부의 일방적 정책을 정당화시키고 적용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준다. 국민이 겉으로는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하더라도 속으로는 얼마든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수의 국민은 천황제의 정책에 순응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다. 순응과 수용은 천황제 하에서 국민에게 요구되는 덕목이기도 했다.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1946년도에 쓴 글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일본인의 정신적 균형은 개인의 안과 밖의 조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밖의 일방적 수용을 통해서 유지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천황제 체제에서는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순차적으로, 권위를 방패삼아 자의적인 폭력을 행사해야 '정신적 균형'이 유지되는 일본 집단의 병리가 드러난다"고 비판적 분석을 한 바 있다. 일본적 정신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병리적이었다는 것이다.

메이지 정부의 출현을 '유신(維新)' 혹은 '혁신'으로 명명하면서도, 영어로는 'Meiji Restoration' 즉 '원형으로의 복고(restoration)'로 묘사하는 데서도 그 모순성이 들어있다. 과거에 있었다는 일본적 이상 혹은 원형으로의 '복고(復古)'라지만 정말로 과거에 있었던 것이라기보다는 새 정부의 정당성과 국가 통합을 이루기 위한 정치적 언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천황제에 담긴 정치이데올로기를 비판한 사학자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는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메이지유신은 복고나 정통으로의 귀환이 아니라 사실상 새로운 종교 체계의 억지 강요나 다름없었다고 비판한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는 천황제의 원리가 국민들의 깊은 경험의 차원에까지 이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곳에서 일본식의 병리 현상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가 일본인들이 저마다 인격적 판단을 한다지만 그 '인격적' 판단이라는 것이 실상은 작은 인격들에 대한 '비인격적 지배' 메커니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고 말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조상숭배와 같은 '종교적' 행위를 습관적으로 하면서도 스스로를 '무종교'라고 자연스럽게 규정하는 현대 일본인의 생활 방식도 한편에서 보면 이러한 흐름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조상숭배나 기복적 행위는 그저 습관이나 문화일 뿐 종교는 아니라는 메이지 시대의 정책이 그 실질적인 기원이다.

더 나아가면 이것은 전쟁으로 주변국에 가한 피해를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반성하지 못하는 태도와도 관련되어 있다. 사실상 강요된 것이나 다름없는 정치로 인해 전쟁에 대해 개인들이 나름 내적 성찰과 비판은 하면서도 그것을 공적 차원으로 외면화하는 훈련은 제대로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적 양심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국민의 '병리적' 정서가 그런 병리 현상의 원인을 제공한 천황제의 지지자들을 여전히 정치의 중심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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