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종교적 정치' 성공, 일본 원령신앙에 기인
메이지 정부, 국가 정체성·정당성 확보 위해 '인신 신앙' 정치화

▲ 모함을 받고 유배갔다 죽은 일본 헤이안시대 중기 학자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천신(天神)으로 모시는 여러 신사 중 교토에 소재한 기타노텐만궁(北野天満宮)의 본전. 죽은 이의 원혼(원령)을 달래서 재앙을 피하려는 마음으로 건립된 신사라는 점에서 인간이 신격화되는 경우를 잘 보여준다. 스가와라가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게 된 이래 오늘날은 시험에서 합격을 기원하는 학생과 학부모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사진=기타노텐만궁 홈페이지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메이지 정부의 '종교적 정치'가 어느 정도 성공한 데는 크게 두 가지 전통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첫째는 제사 양식을 통해 혼령과 상호 관계를 맺어온 일본인의 오랜 전통이고 둘째는 인간이 참배로 위로하지 않으면 무언가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신도식 원령(怨靈) 신앙이다. 죽은 이의 혼령을 중시하는 분위기, 인간 사후에 신격화하는 정서는 불교도든 신도계 종교인이든 일본인에게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민속학자 고마쓰 가즈히코(小松和彦)는 "중요한 것은 어떤 이유에선가 사람을 사후에 신격화하고 그 결과 그 사람을 제사 지내기 위한 시설을 세운다는 점이다. 그 신격을 신으로 부르든지 부처로 부르든지, 아니면 영혼이나 신령으로 부르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도 계통의 종교인이 그 제사에 깊이 관여하면 신이 되는 것이고 불교 계통의 종교인이 관여하는 경우에는 부처가 되어 불당으로 모시게 되는 것이다"고 정리했다.

물론 사후 혼령이 신격화되려면 일정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사후에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릴지 모른다고 간주되는 혼령이라야 진지한 제사의 대상으로 신격화된다. 일본 민속학의 창시자라 할 만한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国男)가 정리한 바 있듯이, 나이가 들어 자연사한 사람보다는 사후에 무언가 한(恨)이 남아 있을 것 같은 사람, 사후에도 분노 같은 감정이 있어서 재앙을 내릴 것만 같은 사람이 영험한 신으로 모셔진다.

고마쓰는 이런 인격적 신령을 '재앙신 계통의 인신(人神)'이라 규정한다.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를 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헤이안(平安) 중기 후지와라 도키히라(藤原時平)가 천황의 총애를 받던 탁월한 학자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략하여 유배를 보냈다. 그런데 스가와라가 유배지에서 사망했고 스가와라를 안타까이 여긴 한 민간인이 작은 사당을 지어 스가와라를 신령으로 모셨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교토에 각종 천재지변과 역병 등이 발생했다. 후지와라는 천재지변과 역병이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원령 때문이라 결론을 내리고 그의 혼령을 모시던 작은 사당을 확대해 기타노텐만궁(北野天満宮)을 조성했다. 스가와라의 혼령을 신으로 모셔 제사를 지냄으로써 비명횡사한 이의 원혼으로부터 재앙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후에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게 된 스가와라는 실존인물이 사후 신앙의 대상이 된 첫 사례다. 무엇보다 죽은 이의 영을 위로하는 중요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

물론 모든 위령 행위가 원령 신앙에 기반해 있는 것은 아니다. 후손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칠 만한 재앙신 계통의 인신 관념만으로 사람의 신격화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천수를 다하고 죽은 권력자나 위인의 경우 재앙을 내릴 가능성이 없는데도 사후에 신격화된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모신 도요쿠니신사(豊神社),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을 모신 도쇼궁(東照宮), 메이지 천황을 모신 메이지신궁(明治神宮),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를 모신 미나토가와신사(湊川神社),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모신 난슈신사(南洲神社)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른바 '현창신(顯彰神) 계통의 인신(人神)' 신앙의 사례들이다.

이때 놓쳐서는 안 될 것은 현창신 계통의 인신을 모시는 신사가 메이지 시대 들어 급증했다는 사실이다. '호국영령'의 개념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조장되면서 강화되었듯이, 메이지 시대에 들어 현창신 계통의 신사를 국가가 적극적으로 창건하면서 민심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메이지 정부는 한편에서는 재앙신 계통의 민중 신앙이 단순히 원령 신앙이 되지 않고 일종의 현창신 계통의 인신 신앙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고도의 정치적 전략을 시도했고 어느 정도 성공하기도 했다.

메이지 정부는 이런 정치 시스템을 '종교'가 아닌 전통적인 '국가의 제사'라고 주장했지만 현창신 계통의 인신 신앙에 기반한 호국영령에 대한 제사는 일본 전역을 사실상 거대한 종교 공동체와 비슷한 구도로 만들어가는 근거로 작용했다. 메이지 정부는 국가적 정체성과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인신(人神) 신앙을 정치화하면서 유지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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