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민중 정서에 '천황'을 뛰어넘는 초월적 권위 없어
천황·국가, 모든 권위 독점…견제와 비판 허용하지 않아
천황제의 영향력은 여전히 지대하다. 일본의 정치·사상·문화 등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정점에서 천황을 만나게 된다. 패전 이후 천황의 인간 선언이 이루어진 뒤에도 일본에서는 천황 '너머'의 세계라는 것에 대한 상상을 별로 해보지 않았다. '하늘의 황제'[天皇] 너머에는 딱히 무엇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우리의 애국가 가사에서와 같은 일반적인 의미의 '하늘' 신앙이 일본인에게는 없거나 약하다. 천명(天命)·천도(天道)·천벌(天罰)과 같은 전통적인 언어들이 있기는 하지만 '천(天)'이라는 글자가 실제 사회적 힘이 발휘되는 것은 '천황(天皇)'에게서이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첫 구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를 일본어로는 "死ぬ日まで空を仰ぎ…"로 번역하고 있다(尹東柱, 上野都 譯, 『空と風と星と詩: 尹東柱詩集』, コ-ルサック社, 2015). '하늘'을 '天'이 아닌 '空'(일본어 발음 '소라')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 김시종의 편역본(尹東柱, 金時鐘 編譯, 『空と風と星と詩: 尹東柱詩集』, 岩波文庫, 2012)에서는 "死ぬ日まで天をあおぎ…"라며 '天'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책 제목에는 여전히 '空'을 사용하고 있다. 天보다는 空이 일본적 정서에 더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
이때 '空(소라)'는 엄밀히 따지면 '허공', '창공'에 가깝지, 한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상위의 추상적 원리, 보편적 진리, 도덕이나 양심의 원천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인 윤동주가 표현하고자 했던 '하늘'과는 거리가 있다. 이렇게 '천' 혹은 '하늘' 신앙이 약하거나 없다는 말은 최상의 정치 권력을 전복시킬 수 있는 초월적 권위가 일본 민중의 정서에는 약하거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본적 공·사(公·私) 이론에도 적용된다. 일본에서 '공'(公, 오오야케)은 사적 영역(私)의 자기 은폐를 통해 드러나고 또 드러내야 하는 세계이다. 그에 비해 '사'(私, 와타쿠시)는 한정되고 감추어져야 하는 내밀한 영역이다.
메이지 시대 대표적 계몽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도 이런 입장을 견지한다. 후쿠자와는 "집의 문지방 안쪽을 '사'로 보고 문 밖으로 한 걸음 나간 세간의 일은 모두 '공·공공'의 것으로 간주한다"고 설명한다. 그 '공'을 최대로 펼치면 국가라는 영역이 되고 최고로 올라가면 천황을 만난다. 후쿠자와의 판단에 따르면 일본에서 천황을 넘어서는 공(公)의 영역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천황을 판단하는 보편적 진리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의 중국학자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는 "일본의 공(公)·사(私)는 천황을 정점으로 그때그때의 상위자나 상위의 영역이 하위자나 하위 영역을 포섭하는 구조를 띠고 있어 천황과 일본이라는 틀을 뛰어넘어 이를 상대화할 수 있는 존재나 원리는 없다…그 바탕에는 최상위 영역인 천황과 국가가 모든 권위를 독점하고 그에 대한 견제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식 및 정치의식이 있다"고 말한다.
흔히 공적 영역도 더 상위로 간주되거나 해석되는 다른 공적 영역을 통해 상대화되지만 일본에서의 공적 영역은 천황이나 국가에서 머문다. 기존 흐름이 바뀌기 쉽지 않은 구조라는 뜻이다. 일본은 하던 대로 한다. 이것은 일본의 정권이 왜 바뀌기 힘든지, 일본은 왜 한국에 사과하기 힘든지, 나아가 일본에는 왜 기독교인이 별로 없는지 등과도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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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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