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실패.., 곧 국가의 실패입니다 -14

▲ 사진=조광한 경기도 남양주 시장
지난번에는 완전히 사라질 뻔 했다가 다시 살아난 도시,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나치 독일의 소련침공, 그리고 히틀러와 스탈린 두 독재자가 격돌해 단일 전투로는 역사상 가장 큰 인명피해를 낳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살펴보겠습니다.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직전인 8월 23일,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과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은 이데올로기 면에서 상극이었는데, 히틀러와 스탈린이 손을 잡은 이유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는 유럽을 점령하기 위해 동쪽의 소련을 묶어둘 필요가 있었고, 스탈린은 조약에 포함된 폴란드 및 동유럽 분할 점령에 군침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발발 약 2년 후인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전격적으로 침공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독재자 히틀러가 두번째 독재자 스탈린의 나라를 침공한 겁니다.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6천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최악의 독재자이고, 스탈린은 수백만 명을 숙청하고 공포정치를 자행한 독재자입니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소련의 식량과 석유를 차지하려는 한편, 그가 증오하는 유대인과 함께 열등한 민족으로 간주하는 소련의 슬라브족을 청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00만 명의 병력과 2700대의 항공기, 3400대의 전차를 동원한 역사상 최대의 군사작전이었고, 히틀러는 소련을 과소평가해 2~3달 안에 전쟁을 끝낼 것으로 판단했지만 독.소 전쟁은 4년이나 지속됐습니다.

독일군은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인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를 먼저 공격했습니다.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끊임없이 포격을 퍼부어 레닌그라드의 식량은 바닥났고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다 인육까지 먹어 2천여 명이 식인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그 포위전으로 1942년 2월에는 매일 2만 명이 죽었고 전쟁 동안 포격, 질병, 굶주림 등으로 최소 100만 명이 사망하고 140만 명이 피난해 레닌그라드의 인구는 300만 명에서 약 64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전쟁 초기 독일은 전격적인 공세로 밀어붙이며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로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최대의 적을 만났는데, 그것은 바로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였습니다. 단기전을 예상한 히틀러는 추위에 대비하지 못했고, 영하 30도의 추위에 독일의 무기와 전쟁 기계들은 모스크바 외곽에서 작동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소련의 반격이 시작됐고 독일은 모스크바에서 240km 밖으로 후퇴했습니다. 독일은 레닌그라드를 포위는 했지만 점령하지 못했고, 모스크바에서 밀려나며 장기전에 돌입하자 석유가 절실하게 필요해졌습니다.

히틀러는 카프카스 지방의 유전지대를 차지해야 했지만 스탈린의 이름이 달린 도시를 점령하는데 집착합니다.히틀러는 지금의 볼고그라드인 스탈린그라드를 집중 공격했고, 스탈린 또한 자신의 이름을 본뜬 도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총력으로 사수했습니다. 1942년 7월 17일부터 약 6개월 간 치러진 역사상 최악의 전투인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된 겁니다.

독일은 33만 명의 병력과 600대의 폭격기로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고 민간인만 4만 명이 희생됐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전차부대는 초반에는 유리했지만 잔해와 파편이 가득 쌓인 시가전에서 신속성과 기동력이 떨어지며 소련의 기관총부대에 비해 취약했고, 또 다시 혹한의 겨울이 시작되고 군복과 식량 등도 점차 고갈됐습니다.

11월부터 소련의 반격이 이어지고 보급로까지 차단되면서 독일군 22개 사단이 포위당했습니다. 후방의 지원이 끊기고 철저히 고립된 독일군은 2개월간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1943년 2월 2일 항복했습니다.

6개월의 전투에서 양측 전사자만 100만 명에 달했습니다. 소련군은 48만 명이 전사하고 65만 명이 부상당하는 등 110만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한 단일 전투로 악명이 높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히틀러와 스탈린, 두 독재자의 자존심을 앞세운 격돌이었습니다. 인류역사상 최고로 잔혹한 두 독재자간의 전쟁에서인간의 존엄성과 그들의 국민은 없었습니다.

다음번에는 히틀러의 집권과 독재의 과정을 두 차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히틀러는 1923년 1표 차이로 당수로 선출된 대중민주주의가 낳은 괴물이었습니다.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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