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경부고속도로, 서 있다면 폭삭 무너졌을 것

<4-(1)에 이어>
박대통령이 스케일 큰 인물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다. 5 . 16직후 최대공사 중의 하나였던 제2한강교의 기공식에서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우리는 비단 제2의 한강교 건설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하여 제7, 제8의 한강교까지 건설을 밀고 나갈 것"이라는 요지의 치사를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바 있는데, 그때 제2한강교의 건설을 주관했던 국토건설청 국토보전국장 김용회씨(현재 쌍용엔지니어링 사장)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본인처럼 경제적인 건설 . 효율적인 투자 등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살림꾼식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대통령의 말씀은 실로 상상외의 방대한 구상으로 들렸다. 1930년대에 제1한강교가 건설된 이래 한강에 제2의 다리가 착공되기까지는 4반세기 이상이 걸리지 않았는가… (앞의 예언은 약 15년 후 1975년경에 성취되고 말았거니와).

런던의 템즈강이나 뉴욕의 허드슨강 등에는 10여개씩의 교량이 건설되어 있지만 이는 부자나라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처지와는 다르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박대통령은 (처음부터) 이 나라를 그와 같이 만들어보겠다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으니 생각하는 차원이 우리와는 달랐었던 것이다"

"대통령을 한다고 아무나 고속도로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이렇게 강조하는 사람들도 많다. 박정희대통령이 아니고서는 그것은 이룩될 수 없는 사업이었다는 뜻이다.

71년 5월 하순이라면 서울~부산 고속도로의 전선(全線)개통을 본지도 1년 가까이 되어갈 무렵이다. "야당 사람들은 없는 말을 만들어 가지고 트집을 잡고 있다"고 박정희 총재가 유세 연설에서 불평을 털어놓은 것도, 하나의 필생의 사업을 마무리지어 놓고 이제 한숨 돌리려하는 그로서는 으레 그럴 법도 한 심경의 피로(披露)였는지도 모른다.

68년 12월 21일 경인 . 경수 고속도로의 개통식을 마치고 난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기자들에게 "그동안 대통령이 빨리 착공하라고 다그쳤기 때문에 건설부장관이 국회에서 ‘왜 법도 통과되기 전에 공사를 시작 하느냐’고 호통을 받은 일도 많았다"고 이야기 했다.

국회의원들로부터 호통을 받은 이는 건설부장관이지만, 그러나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국회에서의 논란은 건설부장관을 전달매체(?)로 하여 사실은 그 화살이 박대통령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나 아닐까.

어쨌든 ‘고속도로’를 연구한 학자의 몸으로서 ‘고속도로’를 닦는 건설부장관의 자리를 맡았다가 정치인인 국회의원들로부터 많은 호통을 받아야 했던 주원장관….

그러나 이 주장관도 겉으로는 굴복당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실은 만만히 당하고만 있었던 인물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속으로는 남달리 배짱이 두둑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일본의 정객 나가이(永井柳太郎)가 쓴 제목미상의 책이 있어요. 거길 보면 자신이 있는 내용은 간단명료하게 답변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질질 끌어라…. 이런 뜻의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반드시 뭐 이 요령을 김과옥조로 삼아서 국회에 나가 써먹은 것은 아니지만, 국회의원들의 질문이 워낙 신랄한 반면에 답변자 측으로서는 예산책정 이전의 사전착공 같은 행정상의 하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나마 동문서답식 시간 끌기 작전으로 밀어 나갔던 적도 없진 않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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