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대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절규 했다. 그가 이시대 살아 있다면 다시 한번 절규 했을 것이다. “자유도 좋지만 공평한 삶을 달라”고
 
지금 온 지구는 신자유주의가 파생한 사회구조적 문제의 쓰나미로 심한 중병을 앓고 있다. 도시(都是) 아수라장이다(대기자님, 도시에 대한 적합한 한문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름아닌 실업문제와 소득 불균형의 문제이다. 글로벌 지각변동이 예견된다. 그 덕택으로 세계의 화두는 단연 공평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공정한 사회에서 살아보자는 이야기다. 대체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4.0 자본주의가 떠오르고 있다. 기득권층들의 사회적 책임은 물론, 서로서로 격려하고 보듬으면서 잘 살자는 것이 핵심 가치이다.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룬 중국 역시 그 쓰나미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빈부의 격차로 고통을 받고 있다. 영화 장면에서나 볼 수 있는 1960년대부터 2000년대의 공존의 장면들이 중국에서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벤츠와 인력거가 함께 움직이는 도로의 모습이다. 너무도 자연스럽다. 다른 하나의 단편적인 예는 지난해 4월 한 시골 마을의 젊은 가장이 양배추 가격의 폭락으로 자살한 사건이다. 양배추 한 근 가격이 우리나라 돈으로 약15원 정도였다. 같은 날 상하이 모터쇼에서는 한대당 한국 돈으로 약 78억 원이나 되는 스포츠카가 개막 첫날 한정판매 5대 모두가 팔렸다. 심각한 빈부격차의 상징적인 장면들이다.

어떻게 이러한 현상들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능한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사는 사회를 이념으로 삼고 있는 국가에서 말이다. 그렇다. 가능했다. 개방덕택이다. 중국은 1978년 개방했다. 개방 후 30여 년 동안 경제 발전은 괄목 할만 하다. 그 동안 전년대비 9%의 경제성장률이라는 고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2010년에는 경제성장률이 10.3%나 되었다.

서방세계가 경제성장의 침체라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중국은 개방정책에 의해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했다. 150위에서 빅2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globalization)라는 물결 속에 오성기의 깃발은 경제대국의 상징이 되었다. 부상이 눈부시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지구상의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냉혹했다. 그 반열에 오르는 동안 국가내부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끝내는 중병이 되었다. 빈부의 격차라는 난치병이다. 급기야 2005년9.9%의 경제성장률은 0.496이라는 불행한 지니계수를 출산했다. 사회동란 유발의 심각한 수준이다. 지니계수란 소득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0∼1 사이의 수치다. 1에 가까울수록 소득분배의 불평등 정도가 높다는 뜻으로 0.4를 넘으면 소득분배의 불평등 정도가 심한 것으로 전망한다.

결국 2005년 0.496의 지니계수는 중국정부에 지각변동을 요구했다. 그로 인해 중국경제의 원동력이었던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이 밀려나는 이변이 일어났다. 중국정부가 선부론(先富論)을 심각한 빈부격차의 주범으로 주목하여 토사구팽(兎死狗烹)했기 때문이다. 대안으로 공동부유(共同富裕) 가 핵심인 공부론(共富論)이라는 처방전으로 그 중병을 치유하고자 깃발을 들었다. 고도의 경제성장을 위해 내팽개친 평등주의를 다시 주워담기 위해서다. 함께 잘 살아 보자는 것이다. 다시 성장 중심에서 분배를 중심으로 한 기본정책으로 그 난제를 풀어 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효험이 신통치 않는 것 같다. 그 처방전을 제시한 2005년 이후 집단 무력시위가 매년 20∼30%씩 늘고 있다. 더욱이 0.496의 2005년 지니계수는 2010년 0.5라는 매우 위험한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사회동란 유발의 수준에서 사회동란의 수준이 되었던 것이다. 효험이 신통치 않다 해도 새로이 개막되는 시진핑 시대의 2013년 화두는 역시 공평이다. 공평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시진핑 시대의 넥스트 10년. 단지 공허한 정치구호 수준이 아니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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