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과 추락, 다시 비상을 꿈꾸며

사라진 마이크, 앵커는 어디로

1980년 12월 초순 어느 날, 미국에서 열린 세계 보도국장 회의를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나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중앙일보> 김건진 특파원과 <조선일보> 안종익 특파원 내외는 우리를 보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12월5일자 <중앙일보>를 펼쳐 보였다.
제11대 국회 민정당 지역구 출마자들의 명단이었다. 서울에서는 종로.중구=이종찬, 용산.마포=봉두완등이 조직책으로 내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갑작스런 소식에 반신반의하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집사람은 신문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을 쏟았다.

세상이 다 아는 얘기지만 용산.마포라는 곳이 김현옥 서울시장 등 여당 후보들이 번번이 떨어지던 지역인지라 집사람은 걱정이 앞선 나머지 울어버렸던 것이다.
실은 국제회의 때문에 떠나기 전 가톨릭 신자들이 보안사의 허화평, 허삼수 대령 등이 새로운 정국에 새로운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는 권유는 했었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지구당 조직책을 일방적으로 떠맡기다시피 할 줄은 몰랐다.
왜 하필 용산, 마포야? 나는 6.25 직전 용산 남영동에서 경복중학교 다녔고, 마포 아현동의 연세대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아마 궁리해낸 것이 용산.마포 지구당이었을까?
그 얼마 전, 주요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에 육사 17기인 허화평, 허삼수, 이현우 등이 참석해 저녁을 하면서 "새로운 정국을 주도적으로 펼쳐 나가는 데 좀 도와달라", 심지어 웃통을 벗어젖히고 큰절을 하며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하고 간청했다. 허삼수는 나와 함께 한강 본당(함세웅 주임신부)에 나가는 사이였고, 허화평은 내 경복고 4년 후배인 이문석, 김동진 대장 등과 육사 동기였고, 백마부대장인 노태우 9사단장 밑에서 연대장과 참모장을 지낸 사이였다.
나는 TBC 앵커맨 시절,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의 자매 부대인 백마부대에 가서 테니스도 치고 폭탄주도 마시며 서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물론 본사에서도 음으로 양으로 사단 장병들을 위해 많은 위문과 후원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새 정치판을 구상하던 신군부는 허화평의 추천으로 나를 어떤 형식으로든 영입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얏트 호텔에서 만난 이종찬 민정당 조익위원장, 윤석순(허삼수와 부산고 동창) 등은 나에게 아직 당명이나 5공화국 출범에 관한 세부사항은 준비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시작에 동참해줄 것을 제의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이미 허화평 등으로부터 무언의 다짐을 받은 터여서 무슨 고문직이나 전국구 같은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TBC 통폐합이 선언되기 바로 전날도 청와대에서 허화평과 허삼수를 만났다. 앞으로의 정국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선 참신한 인재들이 앞장서서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허화평과 허삼수는 모두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여러 가지 좋은 말에 감사하다면서 이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큰 도움을 달라고 했다. 그때도 언론통폐합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 이튿날 TBC 통폐합 발표를 보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남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정말. 어제 오후에 마주 앉아 별의별 소리를 다 해놓고 TBC가 없어진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해주다니."
괘씸하고, 창피하고, 부끄럽고, 미안하기도 했다. 상대방은 칼자루를 쥐고 이러쿵저러쿵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속 빈 강정처럼 오늘의 정국이 어떻고, 앞으로의 사태가 어떻고, 이를 위해 어떤 대책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 내가 갑자기 부끄럽고 왜소하게 보였다. 그로부터 ㅇ러마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전두화 대통령은 당시 TBC 통폐합 방안에 두 번이나 거부권을 발동하고 실무진에게 재고토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끈질기게 언론통폐합을 밀어붙이던 허문도 등 강경 세력에게 그도 두 손 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멀쩡히 잘나가던 TBC를 무엇 때문에 없앤단 말이가. TBC가 정 눈엣가시였다면 구분가 추천하는 사람을 보내 사장직을 맡겨도 되는 것 아닌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제11대 총선이 한창일 무렵, 한 달 전 새로 취임한 미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을 공식 초청했다. 1981년 1월 28일부터였다. 미국을 방문하기 전 1월 23일에는 김대중에 대한 감형이 있었고, 24일에는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미 국무부 알렉산더 헤이그 장관은 이번 방미가 성공을 거둘 경우 한국 내 안정세 회복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메모를 백악관에 보냈다. 마포구 공덕동 골목길을 누비며 표밭을 누비고 있는데 허화평 특보로부터 전갈이 왔다.
"이번에 미국 동행 좀 해야겠습니다."

"아니, 지금 지역구 선거운동이 한창인데 어떻게?"
"봉 선배께서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대통령 방미가 정말 중요하니까요. 우리 쪽에 워싱턴 경험자가 없어서."
미국의 제39대 지미 카터 대통령의 민주당 행정부 때 한미관계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져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최규하 대통령의 잠정적 통치 기간 동안 한미관계는 현상 유지 상태에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제40대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180도 선회하기 시작했다.
임기 막판에 이란 억류 미국인 석방 문제도 해결 안되고, 그보다 9개월 전 미군 인질 구출 특수부대 작전도 실패함으로써 카터에 대한 미국인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몇 달 전 카터가 낚시를 하고 있는데 토끼 한마리가 보트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카터가 노를 가지고 물리치는 장면이 3대 TV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를 크게 문제 삼자 카터의 인기는 곤두박질쳤다.
민주당의 린든 존슨 대통령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텍사스 목장에 휴가차 내려갔다가 백악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랑하는 애견 블랑코가 달려들자 반가운 나머지 두 귀를 잡아 올렸다. 그러자 블랑코가 낑낑거렸는데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이 AP통신을 통해 전송되자 전국 애견가협회에서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위기를 맞았었다.
1965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적인 방미 때였다. 존슨 대통령은 백악관 앞뜰 로즈 가든 환영행사 끝에 느닷없이 박 대통령에게 동쪽 출입문에 줄 서 있는 관광객들 앞으로 개 한마리씩 끌고 가는 연출을 제의했다. 박대통령은 의전에도 없는 갑작스런 제의에 어리둥절한 나머지 옆에 있던 조상호 의전 수석에게 물었다. 물론 양국 실무자 간에 사전 협의는 있었다.
"왜 개를 끌고 가자는 거지?"
"글쎄요. 아마 관광객에게 인사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때 풀 기자로 뒤에서 근접 취재하던 내가 한마디 했다.
"지난번에 존슨 대통령이 강아지 귀를 잡아 올렸는데 낑낑거리는 바람에 그게 언론에 보도되어 혼났습니다. 그랫 아마 오늘 각하가 오시는 걸 계기로 사진에 잘 나가라고 그러는 모양입니다."
"그래? 원 별것을 다......"
보신탕을 좋아하는 한국의 대통령에겐 별로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에피소드였지만 미국의 여론 정치라는 게 그랬다. 카터 대통령이 헤엄쳐 다가오는 토끼를 물리친 것도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였다.
1980년 피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은 10만 명의 쿠바 난민을 미국으로 방출했다. 물론 카터는 이를 허용했다. 남부 플로리다에 안착한 그들 대부분은 교도소에 중범죄자로 수감되거나 정신질환자가 되었다. 마이애미 거주 유권자들은 가뜩이나 경기 침체가 계속 되고 있는데 카터가 쓸데없는 짓을 했다면 미워하는 바람에 재선에 실패했다고 카터 스스로 TV에서 토로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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