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희 국회의장은 대전 중구가 지역구인 6선의 중진이다.

군인 출신이면서도 충남대 총장을 지낸 부친의 영향으로 원만하고 합리적인 성격이라는 평을 듣는다.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을 측면 지원하는 원로자문그룹인 7인회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다. 제5공화국 출범을 앞두고 육군 중령을 예편해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1983년 11대 전국구 의원직을 승계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지난 1995년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했으며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1년 자민련 부총재를 지낼 당시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만들기로 한 김종필 총재의 '의원 꿔주기'에 반발했다가 당에서 제명을 당할 정도로 원칙을 중요시하는 면도 있다.

한나라당 입당 후 최고위원까지 올랐지만 17대 총선에서 탄핵역풍과 세종시를 등에 업은 열린우리당의 충청권 지지도가 급상승하면서 권선택 전 의원에 밀려 석패했다.

18대 총선에서도 충청권에서 자유선진당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또 다시 권 전 의원에게 패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19대에서는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지원유세와 충청권의 새누리당 바람에 힘 입어 42.73%의 득표율로 권 전의원을 여유있게 따돌리며 설욕에 성공했다.


- 국회의장에 선출된 소감은?

▲ 우선 저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주신 대전 중구 구민들에게 감사드린다. 이와 함께 국회 의장으로 선출해 주신 여야 선배, 동료의원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국회의장이라는 중책을 맡게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지난 8년 간 원외 생활을 하면서 국민의 시각으로 국회를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국민들께서 원하시는 국회,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회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 하겠다.

- 국회를 폭력국회라는 평가도 있고, 18대 국회를 보내고 새로운 19대 국회가 시작됐는데 이번 19대 국회의 의미와 역할은 무엇인지, 그리고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인가?

▲ 18대 국회가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18대 국회 말미에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었는데 19대 국회는 이법이 적용되는 최초의 국회이다. 또, 이 법으로 국회에서 여야간 극한대립이 많이 사라질 것이지만 대화와 타협에 의한 상생정치가 완전히 담보된 것은 아닐 것이다.

국민들은 여야간 극한대립의 국회도, 민생현안을 처리하지 못하는 국회도 바라지 않는다. 19대 국회는 여야간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상생의 정치를 이루어 내야한다. 이를 위해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해나갈 생각이다.

- 의장님의 저서 ‘열정의 시대’에서 13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지리산에 입산해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마부작침(磨斧作針)의 심정으로 힘든 시기를 극복한 묘책은?

▲ 마부작침의 고사성어를 실천에 옮겼다. 지리산에 입산할 때 손가락 굵기의 20CM 길이 철근토막 2개를 잘라서 숫돌과 함께 개울에 가져가서 매일 숫돌에 갈았다. 그것이 나중에 젓가락 만큼 가늘어지더라. 그러면서 스스로 세 가지를 다짐했다.

첫째, 절대 뒤돌아보지 말자. 과거 총리비서실장, 국회의원을 했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둘째, 엄격하게 나 자신을 규율하자. 결코 흐트러져서는 안된다. 셋째, 끝까지 추구하자. 마치 축구에서 절대로 공을 끝까지 포기해선 안 되듯이, 당시를 돌이켜보면 제가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도 많이 읽으면서 자기 충전의 기회로 삼았다. 이와함께 지역주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런 것이 힘든시기를 극복하는 묘책이자 재충전의 기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2000년 12월 30일 자민련 교섭단체를 구성하기 위해 국회의원 3명을 꿔온 사건에 반대해 제명을 당했는데?

▲ 당시 자민련이 교섭단체 구성을 염원했지만 정도에서 벗어나는 방식의 교섭단체 구성은 반대했다.
정치인에게는 오늘 살고 내일 죽는 일이 있고, 오늘 죽어서 영원히 사는 길이 있다. 나는 당시 오늘 죽어서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

- 2003년 11월 국회에서 이라크 파병을 놓고 현지 실태 조사를 위해 조사단장으로 다녀온 일화를 들려달라.

▲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갈 수 없는 곳이라면 우리 젊은이도 보낼 수 없다는 마음으로 2003년 11월18일부터 26일까지 8박 9일간 국회이라크현지조사단장 자격으로 나시리아, 나자프, 바그다드 등 이라크 주요도시를 방문했다.

그 중에서 바그다드 팔레스타인 호텔에 묵었을 때 로켓탄 중 한 발이 내 방 바로 옆 기둥에 폭발한 일이 있었다.당시 로켓탄이 1M만 안쪽으로 떨어졌더라도 이 자리에 내가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로켓탄 파편 하나를 기념으로 주어 귀국할 때 가져왔고 그 파편은 지금 헌정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 현재 6선 의원이 되기가지 11, 12대 국회의원, 13대 총선 낙선, 14, 15, 16대 국회의원, 17,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 즉 3번 낙선했다가 당선된 파란만장의 역경속에서 체득한 교훈이 있다면?

▲ 국회의원으로 있다가 낙선한 후 느끼는 허탈감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이다.

경험하지 못한 분들은 상상조차 어렵다. 자존심과 체면을 모두 버려야 했고,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치미는 수모를 견뎌내야 할 때도 많았다. 백번 참는 것이 백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이라 믿고 정치적 큰 꿈을 이루려면 낙선은 오히려 더 크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기회여야 한다고 여겼다.

이것은 좌절이 아나라 일시적 고난일 뿐 기회는 반드시 온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런 믿음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 야인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은?

▲ 하나는 무엇보다 몸으로 사우지 말라는 것이다. 국회는 몸이 아니라 정책으로 싸워야 할 곳이다.
또 하나는 부정부패하지 말라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이권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이 아픈 곳을 어루만져 달라는 것이다. 민생국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느꼈다.

- 15대 국회에서 통신과학기술위원장을 역임하면서 과학기술부장관이 되었다. 이떤 동기로 이 같은 직책을 맡았는지?

▲ 21세기의 진정한 국력은 그 나라의 과학기술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나를 과학기술 분야에 일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과학기술분야에서 인연을 맺은 것은 오래됐다. 육사에서 토목공학을 배웠다. 14대 국회 후반부터 통신과학기술위원회 위원과 위원장, 과학기술부장관으로 활동하면서 남다른 비전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첨단 과학기술을 얼마나 갖고 있고, 지속적으로 개발해 낼 수 있느냐에 국가의 미래가 걸린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과학기술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특별법을 주도했고, 장관 시절에는 과기부 폐지론에 맞서 과기부를 존속시켰던 일이 보람 있던 일중 하나이다.

- 만절필동(萬折必東)으로 연말 대선입장을 피력하셨는데 다가올 대선을 전망하신다면?

▲ 당적 이탈한 무소속 의장으로 대선에 언급한다는 것은 절절치 않은 것 같다. 현재 대선출마를 준비하신 분들 모두 경륜과 능력이 있으신 분으로 판단된다.

바라기는 애국심이 가장 강한 분이 대선에서 승리했으면 하는 것이다. 국민들이 현명하게 판단하리라 믿는다.

- 사생활 질문으로 어머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지?

▲ 어머니는 배화학교,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으로 내려와 배재대학 전신인 대전보육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한국걸스카우트 중앙연맹 이사와 충남연맹장 등을 지내셨다.

어머니는 남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인 분이셨다. 땟거리가 없어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리지 않는 집을 많이 도와주셨다.

어쩌다가 거짓말을 하면 용서하지 않으셨다. 정치를 하면서도 정직한 정치인을 제1모토로 삼고 살아온 것은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얘야 낙선을 축하한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너에게 시킨 것이다.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씀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 헌정사 처음으로 충청권 출신이고, 두 번째 육사 출신 의장이 되었다.

▲ 무엇보다 충청 출신 첫 국회의장으로서 선배 정치인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앞으로도 충청 출신의원들에게 좋은 기회가 많이 생겨야 한다.

저는 군 출신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군대선 정치를 택했지만, 국가와 민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마음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본다.

국민들 사랑과 신뢰를 받는 국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 국회의장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대추 한 알’의 시처럼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 질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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