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대통령 지시로 52년 계획 세워

한국전쟁 전에 서울 시내 주택가 골목에서 집을 찾는 것은 고역이었다.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미로 같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집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일제 초기 도심 일부지역의 도로가 직선화되고 하수도 시설이 정비됐으나 뒷골목은 소방차도 다닐 수 없는 꼬부랑길이었다. 이런 서울의 중심부가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됐다.

전후 서울시 복구를 담당했던 장훈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은 “1951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은 김태선 서울시장을 임명하면서 피란갔던 시민이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 복구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해 7월 부산에 가 있던 서울시청이 서울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폐허가 된 서울 시가지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시민이 한꺼번에 돌아와서 전에 살던 집터에 다시 집을 지어 서울 시가지는 전쟁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판이었다. 따라서 간선도로망.뒷골목 정비.공원 조성.하수도 등 도시기반시설 조성을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정작 전후 첫 복구사업은 시신 매장작업이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와 가로수를 치우고 파괴된 도로.상하수도 시설 등을 정비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아직 많은 시민이 돌아오지 않은 때여서 이런 일을 할 인력을 구하기도 매우 힘들었다.

장과장은 “이승만 대통령.밴플리트 장군.김태선 시장을 모시고 명동.진고개.남대문 일대를 여러 차례 돌아다녔다. 당시 부산에 있던 李대통령은 전후 복구계획을 서둘러 수립하라고 지시한 뒤에도 마음이 안 놓였던지 자주 서울에 올라왔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폐허를 걷다가 지치면 진고개(충무로) 2가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다방에서 차를 마셨다고 했다.

전후 복구계획이라는 게 사실상 서울 시가지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하는 것이었다. 당시 장과장은 김태선 시장과 거의 매일 도면을 놓고 밤을 새웠다고 한다. 그 결과가 52년 3월 내무부 고시 제23호로 발표된 ‘서울 도시계획 가로변경.토지구획정리지구 추가 및 계획지역 변경’이었다. 고시의 주요 내용은 도로 39개 신설, 기존 도로 중 6개 폐지 및 18개 확장 등이다.

세부 계획으로는 ▶광화문 네거리~중앙청 간 도로의 폭을 53m에서 1백m로 확장▶광화문 네거리~오간수교 간 도로의 폭을 50m로 확장하기 위한 청계천 오간수문까지 복개▶중앙청 앞.광화문 네거리.안국동.서울역 앞 등 모두 19곳에 광장 조성 등이었다. 이와 함께 을지로3가.충무로.관철동.종로5가.묵정동을 포함, 모두 19곳이 구획정리사업 대상 지구로 선정됐다.

이처럼 거창한 도로.광장 신설 및 구획정리사업 계획을 세웠지만 해당 토지를 사들이기에는 서울시의 재정이 넉넉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 계획은 70년대 말 구자춘 시장에 이르러서야 마무리 됐다. 전쟁 직후 혼란기에 서울 도심의 골격이 되는 도시계획이 이 정도나마 마련됐던 것이 다행스럽다. 하지만 당시 폐허의 서울을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들의 공적이 대부분 잊혀져 아쉽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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